바람이 분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느낀다. 부는 바람은 단지 공기의 흐름을 피부의 느낌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의 흐름을 눈으로도 알 수 있다. 바람이 보인다. 바람이 움직이는 구름 때문이다. 거대한 구름이 마치 바닷가 파도치듯 몰려왔다가 밀려간다.
운해(雲海)다. 동해의 바다 기운을 듬뿍 담은 하얀 구름이 대관령의 긴 고갯길을 넘어 서쪽으로 넘어가려다가 힘이 부친듯 다시 동쪽으로 밀려간다. 마치 파도의 포말이 허공에 흩날리듯 구름의 끝자락이 파르르 허공에 흩어진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신선이 된 느낌이다.
‘구름멍’이라고 이름을 붙이자. 구름의 오고 감을 멍 때리고 보고 있노라면 복잡한 인간사가 부질없이 느껴진다.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 만물의 이치다.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푸른 전경이 구름이 사라지면 어느새 나타났다 또 사라진다.
이번엔 ‘풀멍’에 빠져보자. 무려 600만 평의 초지가 눈앞에 펼져진다. 여의도 면적의 7.5배다. 그것도 해발 1000m의 높은 산지다.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속에 청량감이 가득 찬다. 초록은 안구를 정화시킨다. 그 초록의 끝을 가늠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초지 군데군데 소떼와 양떼가 있다. 한가롭고 평화롭다.
여기에 풍차가 조연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거대한 풍차가 육중한 날개를 무겁게 돌리고 있다. 대관령 평균 풍속은 초속 7.9m. 일 년 내내 거센 바람이 분다. 대관령 풍력발전은 국내 최대 규모로 모두 53기가 세워져 있다. 강릉시 전체 가구 전기 소비량의 60%가 대관령 풍력발전기에서 공급된다. 대관령 능선에 따라 거대한 뿌리처럼 자리 잡은 풍차를 바라보노라면 이름을 붙이고 싶다. ‘바람멍’이라고.
양치기 견이 펼치는 양몰이 공연
구름과 초원과 바람을 한꺼번에 즐기고 싶다면 대관령 삼양목장으로 가보자.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횡계2리 산1-107번지 등의 60필지에 위치한 삼양목장은 코로나19 시대에 대자연의 정취를 흠뻑 맛볼 수 있는 이국적인 관광명소다. 이국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목장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양몰이 공연은 목양견이 얼마나 똑똑한 개인지 보여준다.
6월 18일 양몰이 공연에 등장한 목양견은 보더콜리다. 보더콜리는 영국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대표 양치기 견이다. 수백 종의 견 가운데 가장 머리가 좋기로 유명하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의 지능 수준이라고 한다. 영화 〈꼬마돼지 베이브〉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얼룩덜룩한 개이기도 하다.
양몰이 공연시간에 맞춰 관람석에 앉으니 멀리 언덕 위에 수십 마리의 양떼가 등장한다. 힘차게 달려 내려온다. 대열이 조금도 흩어지지 않는다. 양떼 뒤에는 보더콜리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달린다. 양떼가 관람석 근처에 다가온다. 보더콜리가 머리를 숙이고 멈춘다. 양떼들을 바라본다.
보더콜리의 목양 방법은 아주 특이하다. 다른 목양견들처럼 짖거나 무는 대신 고양이처럼 몸 앞쪽을 숙인 채 양들을 노려본다. 보더콜리의 안광 탓인지 양들은 보더콜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른다. 양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동작 그만. 보더콜리가 양떼 주변을 돌며 다시 언덕 중간으로 몬다. 언덕 중간에 설치된 구름다리를 먼저 건너며 시범을 보인다.
이어서 한 마리의 낙오 없이 양떼들이 구름다리를 건넌다. 보더콜리는 양떼들의 앞뒤를 분주히 오가며 움직임을 제어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보더콜리의 양몰이에 관람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온다.
수많은 영화 배경이 된 이국적 경관
약 10분간 양몰이 공연이 끝나면 관람객들이 양들과 사귀는 시간이다. 매점에서 파는 양 먹이를 갖고 양떼 사이에 들어가면 양들이 몰려온다.
아이들은 다가서는 양들이 무서워 비명을 지르지만 이내 양과 친해진다. 양이 순하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풀을 먹는 양은 작고 가지런한 앞니만 있고 송곳니는 사라졌다. 젊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아마도 이때 찍은 사진은 동심을 간직한 채 아이와 부모를 평생 연결시킬 것이다.
삼양목장을 천천히 보려면 목장 이곳저곳을 수시로 오가는 셔틀버스를 타지 말고 목책로를 걸어보자. 목책로는 약 4.5km의 초원과 초원을 이어준다. 바람의 언덕, 숲속의 여유, 사랑의 기억, 초원의 산책, 마음의 휴식 등의 이름을 붙인 다섯 구간으로 나누어졌다.
삼양목장의 이국적이고 빼어난 경관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됐다. 드라마 〈미스터선샤인〉, 〈도깨비〉, 〈용팔이〉, 〈베토벤 바이러스〉와 영화 〈웰컴 투 동막골〉 등이 삼양목장의 자연을 배경으로 깔았다. 특히 3구간의 연애소설 나무는 영화 〈연애소설〉의 명장면을 장식했다. 두 시간 정도면 돌아볼 수 있다.
삼양목장은 한때 네덜란드가 원산지인 홀스타인 젖소를 약 3000마리 방목해 키웠다. 동양 최대의 목장이었다. 지금은 젖소 350마리, 양 300마리 정도 키운다. 이제는 목축보다 관광의 비중이 커진 셈이다. 겨울에도 삼양목장을 찾는 관광객이 늘었다. 겨울엔 소와 양들이 들판에서 사라진다. 대신 그 넓은 초지를 눈이 차지한다. 지구온난화로 도시에서 켜켜이 쌓인 눈을 보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겨울이면 문의전화가 온다. “목장에 눈이 쌓였나요?”
눈 구경을 하기 위해 삼양목장을 찾는 이들은 ‘눈멍’에 빠진다. 살을 에는 대관령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허리까지 차오른 눈을 만끽한다.
2022년 삼양목장 문 연 지 50주년
삼양목장에서 키우는 소와 양의 숫자가 줄어든 이유는 구제역과 우지파동 때문이다. 특히 삼양라면을 만드는 기름이 공업용이라는 언론 보도로 전국에서 삼양라면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10년 뒤 대법원에서 무죄로 결론 났지만 그동안 삼양라면이 입은 타격은 컸다.
삼양식품은 1963년 국내 최초로 라면을 개발한 회사다.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에 라면은 단번에 국민 식품이 됐다. 삼양식품은 국민의 단백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고기와 우유를 생산하는 대단위 목장을 건립했다. 고 전중윤(1919~2014)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1960년대 초 당시 제일생명보험사장 재임 시 일본에 출장 가서 라면을 맛보고 라면 생산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라면에 어떤 정신을 심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대관령 목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요”라고 말했다. 삼양식품이 소고기라면을 시작한 동기다. 고 전 명예회장은 “소를 직접 키워 건강한 소고기를 라면 스프에 듬뿍 넣기 위해 목장 사업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2020년부터 삼양목장을 이끌고 있는 정호석(57) 대표는 “삼양목장을 참여형 목장으로 개발해 국민의 코로나19 피난처로 만들고 싶다”며 “2022년이면 삼양목장이 문을 연 지 50주년이 되는 만큼 새로운 볼거리와 신선한 먹거리가 풍부한 웰니스(건강+행복) 목장으로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