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디스트릭트코리아 대표
도심 속 대형 전광판들은 대부분 광고 사업을 위해 설치된다.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유치한 광고를 끊임없이 상영한다.
11월 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와이즈파크에서 만난 이성호 디스트릭트코리아 대표는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의도하지 않아도 전광판 광고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며 “공공성을 가진 대형 전광판은 공공재(퍼블릭 미디어)”라고 주장했다.
디지털 미디어 기술로 혁신적 공간 경험을 디자인하는 디스트릭트코리아는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앞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전광판을 운영하는 CJ그룹에 전광판을 공공미술 작품을 올리는 캔버스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전광판을 위한 디지털 미디어 작품을 자체 제작하겠다는 디스트릭트코리아의 제안을 CJ그룹이 받아들여 별도 광고료 없이 상영하기로 했다. 일정 비율 공익성 콘텐츠를 상영해야 하는 대형 전광판 사업자와 자신이 가진 기술력을 드러낼 기회를 찾던 중소기업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2020년 4월 코엑스 앞 전광판에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역동적으로 춤추는 고래를 초현실적으로 연출한 공공미술 작품 ‘웨이브’가 상영되자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공간 경험과 가치를 창출한 융합 콘텐츠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성호 대표는 “회사가 가진 역량을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시장에 선보일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마케팅 활동의 하나로 시도했는데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세계적으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10월 12~30일 멕시코에서 한류 콘텐츠와 우리 문화유산을 실감콘텐츠로 구현한 전시 <한국: 입체적 상상>을 열었는데 디스트릭트코리아는 이 전시에서 ‘워터폴’과 ‘비치 오로라’를 선보였다.
전광판을 캔버스로 공공미술 작품 상영
미국 뉴욕시 타임스스퀘어에서 가장 큰 전광판을 운영하는 업체가 ‘웨이브’를 본 뒤 같은 프로젝트를 먼저 제안했다. 2021년 여름 타임스스퀘어 중심 광장에 있는 약 1400㎡ 크기의 전광판에 ‘웨일 #2’가 상영됐다.
‘웨이브’처럼 파도에 따라 고래가 움직이는 건 같지만 고래의 재질을 물로 표현해 파도와 어우러지는 일체감을 높였다. 고래가 벽에 부딪히면 물이 퍼지면서 부서지고 벽을 뚫고 사라지는 공간 이동 등으로 더욱더 웅장하고 역동적 모습을 연출했다. 두 면이 꺾인 전광판의 구조를 적극 활용해 입체감과 공간감도 부각시켰다.
현지 방송에 소개될 정도로 미국에서 화제가 된 ‘웨일 #2’는 최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선정한 우수디자인(GD) 대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우수디자인 상품 선정 제도가 도입된 1985년 이래 중소기업 상품이 최고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울러 디지털 미디어 분야 상품이 최고상을 받은 것도 최초다.
디스트릭트코리아는 ‘웨일 #2’와 비슷한 시기에 타임스스퀘어에서 세로로 가장 긴 전광판에 가상의 폭포를 연출한 공공미술 작품 ‘워터폴-NYC’를 함께 선보였다. 매시 정각에 1분씩 일주일 동안 상영할 계획이었지만 뉴욕 시민의 반응에 고무된 전광판 업체의 제안으로 한 달 동안 연장 상영했다.
미국에서 ‘웨일 #2’와 ‘워터폴-NYC’가 화제가 된 뒤 디스트릭트코리아는 ‘디자인계의 방탄소년단(BTS)’으로 불리며 ‘K-미디어아트’의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이 대표는 “기업 고객 대상으로 원하는 콘텐츠를 만들어주는 기업간거래(B2B) 용역 사업은 2021년까지 국내 고객사의 비중이 더 컸었는데 2022년에는 세계적 기업 고객이 늘면서 해외 매출 비중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2020년은 ‘웨이브’ 프로젝트와 함께 ‘아르떼뮤지엄 제주’를 개관하면서 디스트릭트코리아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해다. 아르떼뮤지엄은 자연 소재의 디지털 미디어 작품을 전시하는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이다. 2020년 9월 말 개관한 아르떼뮤지엄 제주는 지금까지 19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방문했다. 여세를 몰아 2021년 8월 여수, 12월에는 강릉에 아르떼뮤지엄을 개관했고 3곳을 합쳐 지금까지 약 380만 명이 다녀갔다. 2023년 여름에는 부산에 4호점을 열게 된다.
2025년 세계 30곳 아르떼뮤지엄 개관
이 대표는 “아르떼뮤지엄은 국내에서 단일 전시 브랜드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감상한 전시가 아닐까 싶다”며 “자연을 소재로 만든 작품들이고 대사가 없는 콘텐츠라 외국 사람들도 좋아하겠다는 생각에 2022년 10월에는 홍콩에도 열었다. 역시 예상대로 외국인에게도 통한다는 걸 확신하게 됐다”고 했다.
2023년 3월 말 중국 청두, 5월 미국 라스베이거스, 12월 미국 샌타모니카, 2024년 초 타임스스퀘어에 아르떼뮤지엄을 잇따라 열 계획이다. 2025년까지 전 세계 30곳까지 늘리는 게 목표다.
아르떼뮤지엄의 성공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건 아니다. 디스트릭트코리아는 10년 전 비슷한 개념의 ‘라이브 파크’를 시도한 적이 있다. 2004년 창업해 국내 대표 웹에이전시 업체로 성장했으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2011년 말부터 100일 동안 열린 비상설 전시에 150억 원 가까이 투자했다. 킨텍스 전시가 끝나면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으로 옮겨 상설 재개장까지 고려한 대규모 투자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15년에는 약 100억 원을 들여 한류 아티스트들의 공연을 증강현실 홀로그램으로 보여주는 ‘플레이 케이팝’을 제주도 중문에 열었으나 사드, 감염병 사태로 중국인 관광객이 줄면서 2019년 문을 닫았다. 대규모 투자가 잇따라 실패하면서 심각한 자금난에 처했고 한때 자본 잠식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두 번의 실패를 딛고 쌓은 세계적 경쟁력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으로 아르떼뮤지엄 제주를 시도했지만 한창 공사 중이던 2020년 초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됐다.
“그때는 ‘마지막 시도마저 망했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이게 위기이자 기회가 됐어요. 코로나19 때문에 해외를 못 나가는 바람에 제주의 관광 수요는 생각보다 괜찮았던 거죠. 가상의 콘텐츠로 만든 자연이기는 하지만 아르떼뮤지엄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10년 동안 두 번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도 성공의 자양분이 됐다. 첫째, 아르떼뮤지엄은 일반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소재를 계속 확장할 수 있는 자연을 주제로 삼았다. 둘째, 상호작용(인터랙션)이 지나치게 많았던 전작과 달리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셋째, 마케팅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입소문이 날 수 있도록 누리소통망(SNS)에 최적화한 공간을 만들었다.
이 대표는 “사람들은 이 산업이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것으로 알지만 우리는 10년 전부터 시도했다”며 “해외 경쟁사들보다 훨씬 앞섰고 전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선도적 시도였다”고 말했다.
“사실 기술력이라는 것도 실패를 여러 번 겪어봐야 느는 건데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높은 역량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공간을 기반으로 상상력과 기술의 융합을 통해 디지털 콘텐츠를 매력적으로 만들어내는 K-미디어아트는 세계적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
올해 우수디자인(GD) 중소기업 약진
정부는 1985년부터 디자인이 우수한 상품을 선정해 정부 인증 표지(GD)을 부여하고 있다. ‘2022 우수디자인(GD) 상품전’에는 2014년 이후 가장 많은 1481개의 상품이 출품됐다. 디스트릭트코리아의 ‘웨일 #2’를 비롯한 중소기업 상품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금상(국무총리상)을 받은 ㈜에프알티의 ‘웨어러블 로봇’은 인체 외부에 부착해 인간의 근력을 보조하는 착용형 로봇으로 일상에서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도록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제작했다. 제품의 무게를 신체의 여러 부분에 분산함으로써 무게감을 최소화했고 탈착과 적응성을 고려한 인간공학적 디자인으로 인체 활동을 지원할 수 있어 고령화사회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린디자인특별상(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을 받은 이십칠와트의 ‘친환경 비누(IROIRO SOAP)’는 다양한 색상으로 각 용도에 맞는 개성을 표현하고 최소한의 디자인과 제품 구성으로 브랜드(BI)를 구성했다. 친환경적 공정으로 제작되는 비목재 종이(미네랄 페이퍼)를 포장재로 사용해 친환경 디자인 노력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심사위원장인 나건 교수(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는 “2022년 출품작에서 특히 중소기업 상품들의 디자인이 눈에 띄게 향상됐으며 코로나19 대유행 시대를 반영해 삶의 질 제고와 업무 효율 향상을 위한 창의적 상품들이 출품된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총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