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됐으니까 아저씨는 빠져요.”
지하철 4호선 두 번째 칸. 언성을 높이며 말싸움하는 학생들을 말리려다가 머쓱해졌다. 둘이 합쳐도 내 나이와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너와 나 모두가 친구인 개방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이 시대정신이라 믿고 있었다.
내가 한 발 뒤로 물러서자마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기 어려운 단어들로 욕 배틀이 이어졌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거친 표현들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된소리로 라임을 맞췄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존재하는 싸움이 잦아들 때까지, 내내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소음 공해 수준의 아무 말 대잔치보다 더 듣기 싫은 게 있었다.
같은 칸에 있던 노년의 여성이 승객들 가운데 나를 콕 집어 물었다.
“아저씨, 이거 미아사거리까지 가요?”
내가 학생이었을 때 지금의 내 나이. 그녀가 목적지를 못 찾는 것일까, 내가 지하철을 잘못 탄 것일까.
다음 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사라진 10량의 지하철.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 자리에 서 있다고 믿어왔는데,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역에 도착하고 보니 10년의 세월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10년의 나이가 고스란히 내게 더해졌다.
“이 아저씨가 모르면 모른다고 말을 해야지!”
서른 즈음에는 결코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마흔 즈음에. 이길 수 없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결국 듣게 되는 말이었다.
“10회에 200만원!” 시간을 이기게 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분명히 나는 얼굴에 점만 빼겠다고 말했으나, 그걸로는 티도 안 날 것이라고 미리 결과를 자신하는 전문가가 있었다. 그는 현존하는 최신의 기술을 적용할 것이며, 최저의 비용을 청구할 것임을 약속했다. 그렇게 명망 있는 병원에서 이름도 생소한 레이저 시술을 받았다. 비용이 저렴한 것은 틀림없었다. 피부를 깎아내는 듯한 안면 통증이 시술 비용에는 포함되지 않은 듯했다.
인고의 시간 끝에 지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반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똑같았다.
“오늘 되게 피곤해 보인다.”
99% 신뢰 수준에 표본 오차는 제로에 가까웠다. “어제 날 샜지?”, “또 술 먹었어?”, 심지어 “태닝했어요?”라는 반응도 존재했다.
지독한 감기처럼, 나이를 숨길 수 없는 나이. 내게는 마흔이 그 경계선이었다. 영 포티(Young Forty)라는 정체불명의 말로 자위해도, 아무리 젊어져도 39세 364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멋모르고 일주일씩 밤을 새우던 몸이, 이제는 커피를 휘발유처럼 넣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구동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하루 두 끼만 먹어도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은, 배가 불러서인지,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몸의 변화는 변해 가는 정신 상태의 반영이었다. 평소에 안 하던 행동,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스스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운전을 하다가 신호 대기 상황에서 신용 카드를 운전석 아래로 떨어뜨렸다. 순간 나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이제 곧 주행 신호가 떨어질 텐데 도로에 떨어진 카드를 어떻게 주워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몸이 약해지면 반대급부로 정신적인 부분이 강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지도 않았다. 적막한 공간, 혼자 있는 집에서 티브이를 볼 때면 설명할 수 없는 우울감과 외로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어렸을 때 뛰어놀던 시골 풍경,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닮은, 비슷한 나이의 할머니만 봐도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내가, 누구보다 눈물이 많아지기 시작한 게 마흔 무렵이었다.
나이는 일면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 1학년을 지그시 바라보며, “좋을 때다.”라고 말하는 게 나이다. 20대에 성인이 되었다고 믿었고, 30대에 비로소 사회인 같다고 자평했으며, 40대에 어렴풋이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희망의 잔량과 늘어나는 삶의 무게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 마흔이라는 나이는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 아저씨가 알면 안다고 말을 해야지!”
우리는 모두 미아사거리에서 내렸다. 같은 곳에서 내려 각자의 길을 갔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희덕_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14회 세계문학상우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