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맛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혼자서는 낼 수 없는 맛. ‘나마슈떼’라는 이름으로 함께 밥을 먹던 그곳에 우리가 잠시 살았다.
“요리 좀 해보셨어요?”
인도로 봉사활동을 떠나기 전, 봉사단 담당 직원들로부터 들은 얘기는 그게 전부였다. 그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나를 포함한 인솔자들에게 부여된 역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세 번, 23명분의 식사를 책임지는 일이었다. 봉사단 학생들이 현지 교육봉사와 노력봉사(농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내 요리 실력이었다. 10년 넘게 혼자 살며 정립한 내 요리 철학은 단순했다.
“먹을 수 있는 걸 만들자.”
인스턴트 음식을 싫어하는 탓에 요리는 종종 하지만, 생존을 위한 것이었을 뿐, 맛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음식 재료들이 다 따로 노는 기현상을 경험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거 누가 만들었어? 만든 사람 나오라고 해!”
누가 내 멱살을 잡고 있었다. 나였다. 봉사단 학생들에게도 그런 소리를 들을까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사전에 프랑스 요리학교라도 등록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나 혼자 먹는 밥이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었다. 열악한 조리 시설과 한정된 재료, 위생 상태 등 극복해야 할 문제들도 산적해 있었다. 나는 인도에 있었다.
인도 주방 신고식은 짜장밥이었다. 카레라이스가 아닌 짜장밥인 것부터가 미스터리였다. 내가 맡은 파트는 밥을 짓는 일이었는데, 놀랍게도 대형 전기밥솥이 있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네, 라며 플러그를 꽂던 그 순간, 전기 합선으로 밥솥에 불꽃이 튀었다. 먼저 수명을 다했다. 결국 인도 전통 방식으로, 커다란 철제 솥에 물을 가득 넣고 쌀이 익을 때까지 주걱으로 저어서 밥을 만들었다. 처음 보는 조리 기구에, 특성이 다른 쌀로 만든 밥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설익은 밥을 먹는 학생들을 보니 밥이 목에 걸렸다. 돌도 씹어 먹을 그들의 나이가 아니라 불평 없이 밥을 먹는 그들의 마음이 마음에 걸렸다.
매일 아침 식빵을 구웠다. 토스터기 없이 다량으로 굽다 보니, 열전도가 고르지 않은 철제 판에 익히다 보니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못생긴 빵, 타 버린 빵이 나왔다.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중 하나를 입에 넣었다. 쓴맛을 곱씹으며 먹고 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일 뿐만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 바로 나였다.
2주간의 체류 기간 동안 인도 현지 음식을 맛볼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커리가 대표적이었는데, 내가 주목한 건 마살라(인도의 혼합 향신료)였다. 재료가 무엇이든 살려내는 마법의 가루. 야채 커리에서도 고기 맛이 났다. 한국으로 치면 라면 스프였다. 수입이 절실했다. ‘난’도 빼놓을 수 없었다. 밀가루 빵이 그렇게 소화가 잘 되는지 몰랐다. 무한정 배 속으로 들어갔다. 탄두리 치킨은 실제로 타 있었다. 요리사가 나와 비슷한 성향인 듯했지만, 인도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짜이(인도식 밀크티)는 마실 때마다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신호가 찾아왔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맛이었다.
소를 신성시하는 인도에서 가장 특이했던 건 염소 고기였다.
“왜 소고기는 먹지 않으면서 염소 고기는 먹는 걸까요?”
내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묻자 언어학자인 단장님이 답했다.
“소를 못 먹으니까 염소를 먹는 거지.”
“…….”
하지만 이 모든 음식보다 더 맛있었던 건, 우리가 만든 밥이었다. 혼자서는 낼 수 없는 맛. 인솔자들이 모두 나 같았다면 인도는 단식원이 됐겠지만, 우리에겐 대장금이 부럽지 않은 인솔자들이 있었다.
“어제 닭을 먹었으니 오늘 메뉴는 닭이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구할 수 없고, 조리 기구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닭볶음탕, 닭고기미역국, 찜닭, 닭칼국수, 닭죽, 닭튀김 등 닭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그 어려운 걸 해냈다. 그들의 손맛 덕분에 학생들이 지치지 않고 봉사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었다.
“미안하고,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살면서 2주 동안 함께 밥을 먹을 사람들이 또 있을까. 봉사단은 같이 밥을 먹는 식구, 사랑한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어 갔다.
비싼 향수를 뿌리고 인도로 출발했다. 그곳에서는 의미가 없는 향기였다. 어느새 내 옷에는 빠지지 않는 음식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인도 아이들을 돌보던 학생들처럼,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던 날들. 내가 입고 있던 것이 인도의 향기였다. 인도의 맛이었다. 기억해야 할 삶이었다.

우희덕_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우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