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은 도성에서 80리(지금의 100리, 40㎞) 안에 만드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임금의 성묘 행차가 하루 안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에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한의 조선 왕릉 40기 중 이 원칙에서 벗어난 능이 다섯 기 있습니다. 바로 단종의 장릉, 사도세자와 그 아들 정조의 융릉·건릉, 세종의 영릉과 효종의 영릉입니다. 이 능들에는 어떤 사연이 있기에 원칙을 어기고 그 멀리에 왕릉을 조성하게 되었을까요?
▶ 경기도 화성 융릉. ⓒ윤상구
경기도 화성에 있는 융릉 자리를 장조(莊祖)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능역으로 결정한 사람은 정조입니다. 융릉 터는 예전에 효종의 국상 때 윤선도가 보고 “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이 없고 천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보고했던 자리입니다. 그래서 효종의 능역 공사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송시열이 반대하면서 동구릉을 추천해 왕의 결정이 뒤집혔습니다. 송시열은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의 대표였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동구릉의 그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해 효종의 영릉은 다시 여주로 천장됐지요. 정조는 동구릉에 있는 효종의 파묘 자리에 할아버지 영조를 묻고, 효종의 자리로 추천됐던 명당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사지냈습니다. 그런데 융릉은 도성에서 88리(지금의 44㎞)나 떨어져 있었답니다. 80리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반대한 대신들에게 정조는 “그냥 80리라고 해라”라고 억지를 썼지요. 그래서 지금도 심한 떼쟁이를 일컬어 ‘수원 80리’라는 말을 쓴답니다.
▶ 세종의 영릉은 그 덕분에 조선 왕조의 수명이 100년 더 연장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명당이라고 한다. ⓒ윤상구
도성에서 140리(지금의 70㎞)나 떨어진 여주는 어떻게 왕릉 자리가 되었을까요? 세종의 영릉은 그 덕분에 조선 왕조의 수명이 100년 더 연장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명당이라고 합니다. 예종 때 영릉을 천장하면서 물길로 가면 하룻길이라는 논리로 합리화해 능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최고의 명당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만든 논리겠지요.
▶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은 단종이 암매장됐던 야산에 만들어졌다. ⓒ윤상구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은 단종이 암매장됐던 야산에 만들어졌습니다. 세조는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을 죽인 후 시신을 동강에 흩어버리라 명했습니다. 그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은 역적으로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엄흥도라는 영월 호장은 목숨을 걸고 노산군의 시신을 거둬어 동을지산 기슭에 암매장했습니다. 그로부터 59년 후 중종 때 노산묘를 찾았고 또 그로부터 100년 후인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단종이라는 묘호와 장릉이라는 능호가 주어졌습니다. 엄흥도가 암매장했던 그 자리에 봉분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장릉은 높은 언덕 위에 있습니다. 봉분 앞쪽으로 정자각 세울 공간이 없어서 가파른 언덕 아래에 정자각과 참도를 만들었습니다.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 ⓒ윤상구
대한제국을 세웠지만 조선의 망국을 지켜봤던 고종과 순종의 능은 조선 왕릉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황제릉으로 조성됐기 때문이지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이고, 유릉은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능입니다.
조선 왕릉과 황제릉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혼유석, 장명등석, 망주석 한 쌍을 제외한 석물들이 사초지 아래 참도 좌우에 늘어서 있다는 점입니다. 또 정자각 대신 일자형의 건물인 침전이 있지요. 침전은 임금의 숙소라는 뜻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왕릉의 정자각과는 용도가 다른 건물입니다. 지붕 또한 정자각처럼 맞배지붕이 아니고 팔작지붕으로 바뀌었습니다.
고종은 1919년에, 순종은 1926년에 세상을 떠났지요. 이때는 이미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망하고 난 후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황제릉이 조성될 수 있었을까요?
홍릉을 황제릉으로 조성하도록 계획을 세운 사람은 고종황제였습니다. 대한제국을 세운 후 고종은 명성황후의 국장을 성대하게 치르고 서울 청량리에 홍릉을 조성했습니다. 이때의 홍릉은 정자각 대신 일자형 침전이 만들어진 것을 빼고는 전통 조선 왕릉의 형식을 따랐지요. 그런데 1900년 6월 고종은 명성황후의 능을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청량리의 홍릉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허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훗날 자신이 함께 묻힐 황제릉을 만들고 싶었고, 청량리 홍릉 자리는 좁았기 때문에 옮길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고종은 중국 황제릉을 참고한 대한제국의 독특한 황제릉 형식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능의 규모와 자리를 결정하고 세부적인 사항까지 계획해 금곡에 거의 모든 설비를 갖춰놓았지요. 이후 거듭되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고종의 생전에 천장이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종이 미리 준비해놓은 덕에 국권을 상실한 1919년 금곡에 황제릉을 조성할 수 있었습니다. 고종은 조선 왕릉의 전통을 계승한 대한제국의 황제릉 형식을 새롭게 창안했고 순종의 유릉은 홍릉의 형식을 그대로 이어서 만든 능입니다.
하지만 홍릉과 유릉은 원래 황제들의 능호가 아닙니다. 홍릉은 명성황후의 능호였고 유릉은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별세했던 순명효황후의 묘소 유강원을 추봉한 이름이지요. 대한제국을 강제 병탄하면서 황실을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킨 일본은 고종과 순종의 능호를 따로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황후들의 능호를 따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