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곤증이 몰려오던 어느 날, 밀린 방 정리를 하다가 틀어놓은 케이블 방송을 봤다. 어떤 의사가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의 요지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의학상식’이었다. 이를테면 ‘숙변’이나 ‘건강보조제’ 같은 것들 말이다.
“속이 더부룩하고, 여드름이 많이 나고, 피로할 때 숙변을 제거하면 몸에 좋지 않나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여성 아나운서가 물었다. 의사는 딱 잘라 숙변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장 청소 같은 건 하지 말라는 소리도 했다. 나쁜 찌꺼기가 장에 있다고 해도, 그게 시간이 지나면 썩어서 물처럼 다 배출된다는 것이다. 마치 개수대에 음식물 찌꺼기가 걸러져 있다고 해도, 계속되면 부패되어 사라지는 것과 비슷한 논리였다.
나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얘길 듣다가, 문득 우리 시대 사람들이 가진 ‘건강 강박증’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런 건강 강박증이 실은 진짜 자신의 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더 ‘젊어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동안을 유지하기 위해 맞는 보톡스도 그렇다.
프로그램에 나온 숙변 제거는 나이 든 여자들이 많이 하는데, 그 이유가 서글프다. 화장이 안 받거나, 얼굴에 뾰루지 같은 것이 많이 나거나, 소화가 안돼서 똥배가 나와 보이거나, 하는 주로 ‘외모’와 관련된 것이니 말이다. 흔히 잘못된 의학상식으로 돈을 버는 일부 의사들의 문제가 더 심각하긴 하지만, 나는 자기 나이를 속이며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가 꽤나 부자연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나이만큼 보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끔 그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불편함과 섬뜩함을 느낀다. 가령 드라마의 한 중년 여배우가 정작 자신의 며느리로 나오는 배우보다 더 탱탱한 목을 가지고 있는 건 너무 비현실적인 일 아닌가.
웃어도 눈가에 주름 하나 지지 않는 60세 시어머니 역할의 여자 배우들을 보는 건 또 어떤가. 너나 할 것 없이 새하얀 이를 가지고 있는 연예인들의 미소를 보는 것도 괴롭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표정 주름이 있는 김혜자나 최민식 같은 배우의 얼굴이 좋다. 주름이 자글거리다 못해 패어 있는 메릴 스트립이나 조지 클루니의 얼굴은 어떤가. 배우의 주름 하나가 훌륭한 연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보톡스를 맞아 빳빳한 사포처럼 얼굴을 펴는 건 시대의 강박증 때문이다.
언젠가 여러 명의 배우를 거느리고 있는 매니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여자 배우들이 왜 그렇게 성형을 하는 줄 아세요? 그건 멜로를 찍고 싶어하기 때문이에요.” 드라마와 영화 속 프레임 안에서 살아야 하는 여배우의 삶도 참 고달픈 것이다.
장 청소하지 마시라. 쓸데없는 짓이란다. 그 의사의 첨언에 의하면 ‘피로회복제 ’ ‘술 안 취하는 약’ 같은 것도 효과가 거의 없단다.
이 세상 어떤 ‘약’이든 간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약은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안 먹는 게 좋다고 한다. 사실 피로회복이란 것도, 누군가의 따뜻한 포옹이나 숙면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라고 한다.
사실 누가 몰라서 안 하는 건 아닐 터. 의학이나 현대 기술의 도움을 받는 건 인생의 참 묘미를 모르는 것이다. 푹 자자. 많이 웃자.
자기 나이대로 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게 삶이라 생각하면서.
글·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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