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잘난듯’ 봄꽃들이 팝콘처럼 톡톡 피는 계절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두말할 것도 없이 걷기다.
이제 봄과 가을은 점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지 않으면’ 지나가버리는 어떤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뉴스에서 올해 진해군항제가 3월 말에 열린다는 얘길 듣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봄비가 내리고, 그나마 간신히 붙어 있던 꽃잎들이 전부 떨어져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식이다. 그래서 봄이면 나는 언제나 지나간 봄을 안타까워하다가 <4월 이야기> 같은 영화로 마음을 달래곤 했다.
봄이 간신히 존재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그러므로 봄을 느끼기 가장 좋은 방법은 버스 타기와 걷기라고 늘 생각해 왔다. 가령 주중에 청계천 광장을 걷는다거나 내친김에 서울숲까지도 걸어갈 수 있다.
찾아보면 서울숲으로 들어가는 자연스럽고도 친환경적인 방법들이 있다. 여의도나 잠실의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들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서울숲까지 들어가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참에 서울의 공원들을 걷다 보면 평소 보기 힘든 돌배나무나 조팝나무들을 볼 수도 있다. 서울성곽 입구의 ‘와룡공원’, 하얏트호텔 맞은편에 위치한 ‘남산야생화공원’, 아이들과 산책하기 좋은 ‘길동자연생태공원’, 여의도의 빡빡한 빌딩숲 사이에 나 있는 ‘한강샛강공원’ 등은 서울의 숨겨진 시크릿 가든이다.
한강공원을 걷는 봄밤, 사람들이 두런두런 얘기하며 둘러앉아 치킨을 곁들여 맥주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다. 철쭉이 가득 피어 있는 공원을 지날 때 한강의 밤바람이 시원했다.
언젠가 <론리 플래닛> 서울판을 들고 서울을 여행해 보는 엉뚱한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권위를 자랑하는 여행자들의 바이블이 서울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아마존에 책을 신청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언젠가 한 블로거가 썼던 론리 플래닛 한국판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국적 특징의 또 다른 점은 관대함이다. 식당에서 서로 계산하려고 싸우는 것은 흔한 현상이고, 설날이나 추석에 선물 주는 것에 열정적이며, 가게들은 산처럼 쌓인 선물세트로 가득해진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첨탑, 눈이 부신 궁궐의 화려함 같은 론리플래닛 특유의 호들갑스러운 과장법이 서울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보는 것도 서울을 여행하는 또 다른 재미 아닐까.
여행을 할 때마다 공항에서 볼 수 있는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나는 조금 서글프게 느껴졌다. 최고의 노동시간을 자랑하고, 모든 게 빠르게 바뀌는 이곳의 삶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 같아서 그렇다.
우리는 너무 숨차게 달리듯 사는 건 아닐까. 한 시간, 두 시간을 온전히 사는 게 아니라 하루 혹은 한 달, 일 년을 마감 치르듯 뭉텅뭉텅 언제 써 버렸는지 모르게 소비하는 건 아닐까.
걷기는 봄을 봄으로, 가을을 가을로, 시간을 시간으로 그대로 느끼는 행위다. 정리하지 못했던 일들을 사색하게 만들고, 속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철학적인 행동인 것이다. 철학책은 고사하고, 책 한 줄 읽기도 힘든 때에 걷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 봄이다. 걷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글·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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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