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필름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코닥에게 디지털 카메라는 부담스러운 제품이었다. 업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만들었지만 내부 반발에 부딪혀 주력 사업으로 전환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수익이 많이 나는 필름 시장을 스스로 망가뜨릴 이유가 없었고 필름에 비해 성능이 나쁜 제품을 팔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CEO가 디지털 사업부를 전략 사업으로 밀었지만 당장 수익을 낼 수 없었던 탓에 타 부서의 견제를 이겨내기는 힘들었다. 결국 디지털 카메라 분야에서 뒤처진 코닥은 지난 1월 파산 선청을 하고 만다.
이것이 하버드대 교수 크리스텐슨이 말하는 파괴적 혁신의 모습이다. 파괴적 혁신이란 기존 시장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새로운 기술이 출현하는 상황을 말한다. 파괴적 혁신의 가장 큰 특징은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기업은 그 성공이 족쇄가 되어 파괴적인 기술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는 필름 시장 자체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필름 시장을 주도하던 코닥이 퇴출당하고 말았다.
아날로그 TV의 강자 소니도 마찬가지였다. 소니는 브라운관에 비해 화질이 나쁘다는 이유로 LCD-TV 생산을 거부했다. MP3의 낮은 음질을 문제 삼다가 ‘워크맨’으로 대표되는 휴대용 음향기기의 선두주자 자리도 뺏기고 말았다.
하지만 파괴적 혁신을 몰고 온 제품은 곧 기존 제품의 성능을 따라잡게 된다. 방심하고 있는 동안 이런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순식간에 성장하여 시장을 독차지하게 된다.
소니는 아날로그에 대한 집착으로 디지털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 한 탓에 경쟁력을 상실했다. 소니가 기록적인 적자 행진을 벗어나기 위해 최근 몇 년간 1만명이 넘는 대량 감원과 CEO 교체를 반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지털 시대의 주도권은 한국으로 넘어왔다. 한국은 디지털 강국이다. 메모리, LCD, PDP, 낸드 플래시와 같은 부품뿐만 아니라 완제품 TV와 휴대폰까지 세계 1위를 석권하고 있다. IT 강국, 반도체 강국, 통신 강국이란 평가는 디지털 분야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세계는 디지털 시대를 지나 클라우드 중심의 모바일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때문에 소프트웨어와 콘텐츠에 기반한 플랫폼이 중요하게 되었다.
플랫폼 전쟁은 또 다른 거대 기업의 몰락을 가져오고 있다. 사용자와 개발자를 아우르는 모바일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 휴대폰 세계 1위 기업 노키아가 적자로 돌아섰다. 핀란드 경제를 이끌어가던 국민 기업에서 감원 파동으로 핀란드 내 주가 1위 자리도 뺏기고 말았다. 오바마가 들고 다녀 화제가 되었던 업무용 스마트폰 블랙베리의 제작사인 캐나다의 림사도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노키아와 림사의 공통점은 콘텐츠 유통망 확보와 생태계 구축에 실패함으로써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제 시장점유율이나 하드웨어 성능 경쟁으로는 시장을 지배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PC 시대를 호령하던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위기를 거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MS는 윈도우 운영체제와 오피스 프로그램으로 천하를 통일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자 익스플로러로 웹 브라우저 시장을 장악한 후 오랫동안 웹의 발전을 가로막아왔다. 인터넷의 온라인 프로그램이 발전할수록 윈도우와 오피스 판매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결국 MS의 방해에 맞서 업체들이 연합하여 웹 브라우저에 다양한 기능을 내장한 HTML5 표준을 제정함으로써 PC가 없어도 웹에서 문서 작성 같은 업무가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모바일 시대가 되어 HTML5 지원이 늘어나면서 탈 PC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PC 판매량을 넘어섬에 따라 MS는 영향력도 줄어들고 있다. MS는 윈도우폰으로 시장 탈환에 나서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강력한 생태계 구축에 성공한 애플과 안드로이드 진영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모바일 분야를 이끌고 나갈 것으로 예측된다.
한국은 디지털 강국이지만 제조업 분야의 경쟁력은 오래 지속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통신사들의 물리망 위주의 사업 모델도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 망보다는 서비스로 승부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역 통신사는 이제 전 세계인을 사용자로 하는 카카오톡과 같은 모바일 메신저 업체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한국 포털의 생존도 낙관할 수 없다. 최근 세계 1위 포털 야후가 1만4천명의 직원 중 2천명을 해고했다. 인터넷 황제였던 야후는 기술 경쟁에서 탈락함으로써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국의 포털도 검색,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스마트테크 등 미래기술에 전념해야 할 중대한 시기에 오픈 마켓 진출과 같은 단기적인 수익 확대에만 매달리고 있어 야후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이라도 포털은 기술 개발과 함께 중소 인터넷 사이트와 상생할 수 있는 생태계 구축에 나서야 한다.
모바일로의 환경 변화 속에서 세계적인 트렌드를 주도하던 기업들이 차례로 몰락하고 있는 대신 차고에서 시작한 새로운 기업들이 파괴적 혁신을 선도하고 있다.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등이 모두 벤처로 시작하여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디지털 강국 한국이 플랫폼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벤처와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이제 무너진 IT의 복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될 것이다. 컨트롤 타워 재건과 IT 혁신에 대한 일정도 만들어야 한다. 망중립성 확립, 표준 보안 방식 도입, 액티브엑스 제거 등의 정책은 경쟁력 회복 차원에서 최우선으로 추진해야할 것이다. 한국도 인터넷 강국으로 재도약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사회 전체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글·김인성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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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