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급속도로 변한다지만 굴비는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요즈음 굴비는 옛날의 굴비가 아니다. 그 유명한 ‘영광굴비’는 법성포 앞 칠산바다를 지나는 참조기를 잡아 그 지역에서 나는 천일염으로 간하여 햇빛과 해풍에 두세 달 말린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특히 곡우 무렵에 잡히는, 산란 직전의 알이 꽉 찬 조기로 만든 굴비는 ‘곡우살 굴비’ 또는 ‘오가재비 굴비’라 하여 최상품으로 쳤다. 그러나 칠산어장에는 더 이상 조기 떼가 오지 않는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 제일의 조기 어장이었던 칠산탄 일원은 조선시대부터 곳곳에 파시가 설 정도로 많이 잡히던 동네인데 그곳에서 조기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요즘은 목포 연안과 추자도산은 물론, 심지어 중국산과 원양에서 잡아온 조기로도 굴비를 만든다. 어디에서 잡힌 조기라도 법성포에서 말리면 ‘영광 법성포 굴비’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요즈음 굴비는 예전처럼 두세 달씩 말린 ‘건조굴비’가 아니다.
냉장·냉동기술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입맛이 바뀌면서 짜고 딱딱한 굴비를 찾지 않게 된 데다 오래 말릴수록 크기가 줄어들어 경제성까지 떨어지니, 대충 소금 간을 하고 말리는 시늉만 한 ‘간조기’가 굴비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몇 시간씩 쌀뜨물에 담갔다가 쪄서 먹거나 손으로 죽죽 찢어 고추장에 찍어 먹던 마른 굴비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영광굴비가 큰 명성을 얻는 데는 법성포의 기후조건과 간하는 방식도 한몫을 했다. 봄, 여름에 이 지역에 부는 편서풍과 낮에는 낮고 밤에는 높은 습도는 조기를 건조하는 데 이상적인 조건이다. 또 아가미와 몸통에 간수 뺀 소금을 뿌리는 ‘섶간’ 방식으로 염장하기 때문에, 흔히 소금물에 담가 절이는 다른 지역의 굴비에 비해 맛이 좋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린 굴비를 통보리 속에 넣어두면 기름을 잡아주고 습기도 차지 않아 오래 보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보리굴비’다. 매년 추석 대목만 되면 백화점과 시장에 굴비 선물세트가 즐비하게 진열된다.
최근에는 300만원을 호가하는 초고가 세트까지 등장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옛날에도 굴비는 귀한 선물로 인기를 누렸던 모양이다. 최근에 발견된 400년 전의 고문서에서 당시의 영광 군수였던 임광이 한양의 친지와 조정 대신들에게 굴비를 선물로 보낸 기록이 나왔다니 말이다.
하긴 그 시절의 시인 이응희는 ‘조기’라는 시에서 “불에 구우면 좋은 반찬이 되고 (爛炙知佳餐)/ 탕으로 끓여도 맛이 좋아라 (濃湯作美鮮)/ 그 모습은 비록 크지 않지만 (形容雖不碩)/ 쓰임새는 한두 곳이 아니라오 (爲物用無偏)/ 가장 좋은 건 굴비로 말리면 (最憐乾曝後)/ 밥반찬으로 으뜸이라네 (當食必登先)”라고 그 맛을 예찬했을 정도다.
굴비라는 이름은 고려 인종 때 권좌를 탐해 난을 일으킨 척신 이자겸이 지은 것이라는 속설이 전해진다. 그가 오늘날의 영광인 정주로귀양을 갔다가 해풍에 통째 말린 조기를 먹어보고 그 뛰어난 맛에 반해 임금에게 진상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는 않겠다는 의미로 ‘굴비(屈非)‘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굵다’에서 비롯된 ‘굴기’가 굴비로 변해 당시 현지에서 불리고 있었는데 이자겸이 그 이름을 자신의 소신에 빗대서 한자로 굴비라 썼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손으로 뜯어서 찬물에 만 보리밥과 함께 먹던 옛날의 건조굴비는 여름의 별미였다. 법성포의 굴비 생산업체 중에는 주문하면 예전 방식으로 만들어주는 곳도 있다 하니 수소문해서 부탁이라도 해볼까 싶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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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