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도 세월 따라 요리법이 변하고 그 위상도 변한다. 우리가 즐겨 먹는 잡채는 그러한 사례의 대표라 할 만한 찬선이다.
잡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30년에 간행된 문신 신흠(申欽)의 문집 <상촌집(象村集)>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임금과 가까운 간인에게 빌붙어 못 할 짓이 없이 날뛰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잡채상서(雜菜尙書)니 침채정승(沈菜政丞)이니 하는 말들이 세상에 나돌았는데, 이는 대체로 잡채나 침채 등을 바쳐서 총애를 얻었기 때문이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때만 해도 세상이 지금보다는 어수룩했던지 잡채나 김치가 출세를 위한 뇌물로 다 쓰였던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작자 미상의 책 <일사기문(逸史記聞)>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충(李沖)은 잡채를 헌납하여 호조판서에 오르고, 한효순(韓孝純)은 산삼을 바치고 갑자기 정승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산삼정승을 사람들은 다투어 흠모하고(山蔘閣老人爭慕) / 잡채상서의 세력은 당할 수가 없네(雜菜尙書勢莫當)”라는 당시 시중에 떠돌아 다니던 조롱조의 시구까지 소개하고 있다.
<광해군일기>에는 이충의 행적이 더욱 자세하게 나오는데, “그는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궁중에다 바치곤 했는데, 왕은 식사 때 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고 적고 있으며 <일사기문>에 실린 것과 비슷한 “사삼정승 권세가 처음에 중하더니(沙參閣老權初重) / 잡채상서의 세력은 당할 수가 없네(雜菜尙書勢莫當)”라는 시를 인용하고 있다. 한효순을 거론한 부분은 산삼이 사삼(더덕)으로 바뀌었지만 이충을 언급한 대목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충의 잡채 이야기는 그때 세간에 널리 회자되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잡채의 조리법에 관한 기록은 1670년경에 나온 최초의 한글 요리책 <음식디미방>에 처음 보이는데 오이채, 무, 댓무, 참버섯, 석이버섯, 표고버섯, 송이버섯, 녹두질금, 도라지, 거여목, 마른 박고지, 냉이, 미나리, 파, 두릅, 고사리, 시금치, 동아, 가지와 꿩고기 등이 재료로 들어간다. 오늘날의 잡채에 비해 훨씬 다양한 채소가 쓰이지만 지금은 흔히 넣는 당면이 들어가지 않는 점이 눈에 띈다.
그 이후에 나온 문헌들인 <음식보(飮食譜)>나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규곤요람(閨?要覽)> 등에도 잡채 만드는 법이 수록되어 있지만 당면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당면이 재료로 들어가는 잡채는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과 <조선요리제법>에 비로소 등장한다.
당면(唐麵)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기원을 중국에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인들이 소규모로 당면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912년에 한 일본인이 중국인들로부터 기술을 배워 평양에서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1920년에 양재하(楊在夏)라는 한국인이 중국인들을 다수 고용하여 사리원에 광흥공창이라는 대규모 당면 공장을 열자, 평양의 일본인 공장은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고 한다. 잡채에 당면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이때쯤이 아닐까 싶다. 결국 새로운 음식의 탄생도 재료의 공급이 좌우하는 것이다. 광해군이 당면잡채를 먹어본다면 과연 어떤 벼슬을 내릴지 궁금하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