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文魚)는 선비의 물고기다. 문어는 이름에도 ‘글월 문(文)’자가 들어가지만 몸에도 먹물을 지니고 있어 가히 식자의 먹거리라 할 만하다. 그래서인지 유교의 본고장인 안동 일대에서는 잔칫상이나 제사상에 문어가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문어라는 이름의 유래가 학문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설명도 있다.
조선 후기의 이규경이 편찬한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원나라의 문헌 <여황일소(艅?日疏)>를 인용하여 “문어가 사람의 머리와 닮아서 문어라 한다”고 했다. 이 짧은 구절의 해설로 문어의 생긴 모습이 사람의 민머리처럼 생겨서 ‘?어’라 부르다가 한자로 문어라 쓰게 되었다는 부연 설명이 따라붙기도 한다.
어쨌거나 조선시대에는 문어를 궁의 잔치에도 쓰고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치기도 했던 모양이다. <승정원일기>에는 궁의 연회에 쓸 생문어를 때에 맞춰 봉진하지 않는 충청감사와 강원감사를 엄하게 추고해달라는 사옹원 도제조의 계가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에는 명나라 사신이 청구한 물품 중 경상도와 함길도(함경도의 옛이름), 강원도에 준비케 한 목록에 마른 문어가 나오기도 한다.
문어는 옛날에도 그 값어치를 상당히 인정받았던 듯 조선시대의 외교 관계를 기술한 책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는 문어 한 마리를 쌀 다섯 되와 바꾼다고 했는데 이는 생복 다섯 개에 해당하는 가치이다.
문어는 대팔초어(大八梢魚), 팔초어(八梢魚), 팔대어(八帶魚)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장어(章魚) 또는 망조어(望潮魚)라 부르기도 한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문어는 동해에서 나는데 중국인들이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하러 왔던 이여송(李如松)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들에게 문어국(文魚羹)을 대접했더니 난처한 빛을 보이고 먹지 않더라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익은 그 이유로 그들 일행이 대부분 북쪽 지방 출신이라 문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광해군 때의 시인 이응희는 <옥담사집(玉潭私集)>에 남긴 ‘문어’라는 시에서 “용을 삶은들 무어 귀하리오(烹龍何足貴)/ 봉을 끓여도 대수로울 게 없어라(湯鳳亦無奇)/ 온 세상이 잔치를 열 때마다(擧世張高宴)/ 좋은 안주로 이것이 꼭 필요하지 (佳肴必汝期)”라고 그 맛을 예찬한 바 있다. 문어는 몸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 조선 후기의 홍만선이 저술한 <산림경제>의 구급편에는 “산후에 발열할 때는 문어를 가루로 만들어 콩잎국(藿羹)에 타서 먹인다”는 민간 처방이 나와 있다.
19세기 초의 <규합총서>에는 “문어 알은 머리, 배, 보혈에 귀한 약이므로 토하고 설사하는 데 특효하며 쇠고기를 먹고 체한 데는 문어 대가리를 고아 먹으면 낫는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문어 최대 소비지는 예상 외로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안동과 영주 같은 내륙지방이며 그곳 사람들은 숙성 문어를 즐긴다. 교통 사정이 좋지 않던 옛날에 울진과 영덕, 묵호 등지에서 잡은 문어를 현지에서 삶아 한나절씩 걸려 산간으로 옮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숙성이 되어 맛이 더욱 좋아진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우친 것이다. 알고 해먹은 것이 아니라 지리적 여건이 요리법을 가르쳐 준 셈인데,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영주 중앙시장의 ‘묵호문어’와 안동 신시장의 ‘중앙문어’는 각 지역에서 이름을 떨치는 문어 전문점들이다. 서울에서는 논현동의 ‘한성칼국수’와 혜화동의 ‘혜화칼국수’에서 괜찮은 문어숙회를 맛볼 수 있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201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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