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두 시간.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도 좋고, 터미널에서 버스를 잡아타도 좋고, 자가용으로 운전을 하고 가도 좋다. 어떻게 가나 부담 없는 거리다.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에 걸쳐있는 제천은 한반도의 배꼽, 내륙의 중심에 있다. 내륙 깊숙이 들어앉아 있기는 하지만 큰 호수와 저수지도 있고, 월악산과 금수산을 비롯해 지등산 줄기에는 박달재라는 고개도 있어서 산과 물을 두루 아우르는 경치 좋고 아늑한 동네다.
제천 여행은 뭐니뭐니해도 청풍호가 중심이다. 호수 인근을 아우르는 산과 길, 명승지는 귀한 덤이다. 청풍호에 한번 발을 들여본 사람이라면 이 거대한 호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익히 잘 알테다. 곧잘 베트남 하롱베이와 그 풍광이 비교되기도 하는 절경의 호수다.
하지만 제천은 여행지로 크게 이름 난 곳이 아니니 이 호수를 깊이 느껴 본 사람도 어쩌면 그리 많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 덕분인지 어느 계절에나 번잡스럽지 않다는 것도 매력이다.
청풍호는 충주호의 또 다른 이름. 충주와 제천, 단양이 만나는 곳에 호수가 있으니 각자 자기의 영역을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나의 호수이지만 충주에서는 충주호가 되고 제천에서는 청풍호가 된다.
유람선·모노레일 타든, 호숫가 걷든 절경에 감탄
청풍호를 즐기는 방법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배를 타고 유유자적 청풍호의 절경을 감상하는 청풍호 유람선을 타도 좋고, 청풍호 곁으로 난 트레킹 코스인 ‘자드락길’을 걸어도 좋고, 청풍호를 배경 삼아 지어진 리조트나 펜션에서 여유로운 휴식을 취해도 좋다. 또 청풍호 관광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대에서 청풍호를 내려다보는 것도 기가 막히고, 청풍문화재단지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하는 산책도 일품이다. 청풍호에 직접 뛰어들어 수상 레저를 즐기거나 청풍랜드에서 번지 점프를 해도 좋겠다. 청풍호를 즐기기 위한 방법은 다양하다. 어느 것이든 청풍호를 누리고 싶은 대로 각자의 취향을 따라가면 된다.
그 중에서도 남녀노소 취향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청풍호 유람선이다. 유람선의 코스는 어느 선착장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 다양해서 선착장도 여럿이다. 충주에서 출발하는 충주유람선과 월악유람선이 있고, 제천에서 출발하는 청풍호유람선을 비롯해 단양에서 출발하는 장회유람선과 신단양유람선도 있다.
제천에서 탈 수 있는 유람선은 청풍호유람선이다. 청풍문화재단지를 산책하고 난 후 바로 탈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단양팔경인 옥순봉과 구담봉을 보면서 장회 선착장까지 다녀오는 1시간 30분 코스다. 하늘과 호수를 동시에 마주 바라볼 수 있는 2층 뱃머리와 3층 좌석이 특히 인기다. 배에 몸을 싣자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는 것처럼 배가 바람에 날리듯 떠간다. 편안히 누군가의 품에 안긴 듯,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다.
호수는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 큰 넓이만큼이나 큰 그릇으로 사람과 자연을 아우른다. 말 없는 호수에 기대어 있다 보면 할 말을 잃는다. 대자연은 말 많고 탈 많은 사람들의 입을 단숨에 막아버린다. 입은 막히지만 가슴은 뚫린다. 말로 풀 수 없었던 답답한 가슴이 바람의 언어, 물의 언어로 서서히 풀어진다. 머리칼 속으로, 먹먹했던 가슴속으로, 온몸의 땀구멍 속으로 상쾌한 호수의 바람이 스며든다.
7개 트레킹 코스로 이루어진 ‘자드락길’
자드락길이란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에 난 좁은 길을 뜻한다. 청풍호반과 어우러진 정겨운 산촌길로 짧게는 1.6킬로미터에서 길게는 19.7킬로미터까지 7개의 다양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1.6킬로미터로 가장 짧은 코스인 2코스 정방사길 걷기를 추천한다. 물소리 지줄대는 숲길을 걸은 후엔 천년고찰 정방사의 운치와 전망을 두루 누릴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 정방사는 절벽 아래 제비집처럼 지어져 있어 신비한 느낌을 주는 사찰로, 정방사에서 바라보는 청풍호와 월악산 자락이 장쾌한 풍광을 연출한다.
약간 여유가 있다면 2코스와 같은 곳에서 시작하는 3코스 얼음골 생태길도 걸어볼 만하다. 어느 스님이 세워 놓았다는 정성어린 돌탑들을 지나 얼음골까지 가는 이 길은 한여름에는 시원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드는 걷기 좋은 길이다.
‘걷기’는 다리를 움직이는 일 같지만 실은 머리와 가슴을 움직이는 일이다. 뚜벅뚜벅, 바그작바그작 발걸음을 내디디며 머리는 인생의 길을 생각하고 가슴은 바람을 느낀다. 숲에서 불어오는 파랗고 노랗고 또 때론 짙은 낙엽 빛깔의 바람이 머리를 식히고 가슴을 덥힌다. 이것이 걷는 맛이다. 제맛이다.
청풍호 관광 모노레일은 제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컷이다. 모노레일을 타고 20여 분만 오르면 청풍호가 360도로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닿는다. 처음엔 산에 괜한 짓을 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라도 걸어서 올라가면 될 일을 괜히 산을 파헤쳐 놓아 생태를 어지럽힌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정상의 전망대에 오르자 생각이 달라진다. 나도 모르게 외마디 감탄사를 쏟아내게 하는 청풍호와 인근 마을의 풍경 앞에서 무아지경이 되어버린다. 무릎 관절이 약한 어르신이나 산에 오르기 어려운 어린 아이들도 이런 경관을 한번쯤은 누려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데에 마음이 닿는다.
스위스의 어느 산 위, 혹은 뉴질랜드의 어느 트레킹 코스와도 닮았다. 이국적이고도 몽환적인 풍경이 쉬 말을 잃게 하고 복잡한 생각마저 버리게 한다.
이곳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도 활용된다. 글라이더들이 뛰기 편하라고 비스듬히 지어진 데크와 매트가 청풍호와 하늘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글라이더가 없어도 숨어 있던 날개 한번 힘껏 펼쳐 뛰어보고 싶다. 한순간 큰 날개 펄럭이며 새가 되어 날아가고 싶다.
아니, 언제까지고 이렇게 내려다보며 저 아래 세상 속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다. 도시락이라도 싸올 걸 그랬다. 아무 데고 털썩 자리 잡고 주저앉아 시간을 저 아래로 흘리며 이 자연과 오래도록 벗하고 싶다. 맛있는 음식, 멋진 풍광은 좋은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사랑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 사랑할 사람. 그들과 함께 다시 오고 싶다. 오늘처럼 맑은,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 2013.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