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로 이사 와 처음 생긴 재미는 식도락이다. 시골이라 값싸고, 게다가 전라도라 맛 또한 일품이었다. 장터 국수집, 이름 없는 중국집, 아무도 눈여겨봐 주지 않았던 시골 맛집 찾기에 흠뻑 빠져 있던 중 집근처에서 다슬기집을 발견했다. 언제 가도 한적해서 솜씨만큼 인물도 좋은 주인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김장 김치도 얻어 먹곤 했는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어떻게 소문이 난 건지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휴일이면 2층까지 발 디딜 틈 없이 손님들이 들어차는 바람에 손님 접대 아니고는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집만이 아니다. 오가는 차 드물어 섬진강 기웃거리며 한가롭게 다니던 길도 휴일이면 외지 차량들로 속도를 내기 힘들다. 산수유 피고 매화 피고 벚꽃 피는 주말이면 아예 차 끌고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누구나 여행을 즐기는 좋은 세상이요,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산수 수려한 곳에 살고 있음에 자족하면 그만일 테지만 어쩐지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가계 부채 1천조원 시대에도 해외 여행객은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해외 여행을 위한 적금을 들고 그도 준비되지 않았으면 빚을 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물론 빚이라도 내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여행은 설레는 일이다. 여행은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인 동시에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다. 하릴없이 낯선 도시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세느 강변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며 무심히 노을을 바라보는, 그 목적 없는 쉼이야말로 진정한 휴식이며, 부산한 일상으로부터의 거리는 자신의 지나온 시간들을 가만히 돌아보게 만든다. 휴식과 반추야말로 여행의 진정한 목적이다.
언젠가 4박5일 일정의 중국 여강(麗江·Lijiang) 단체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관광은 물론이요 쇼핑에 이르기까지, 잠시의 휴식도 없는 일정이었다. 그 후로 다시는 단체 여행을 하지 않는다.
나 사는 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인터넷에서 미리 검색한 유명 관광지를 돌고, 역시 인터넷에서 검색한 맛집을 순방하고, 어디를 가든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내가 이 유명한 곳 전남새뜸에 왔고,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는 증거라도 남기듯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느라 정신이 없다. 여행지를 고를 때도 물론 인터넷 검색이 필수다. 유명한 곳은 반드시 가야만 하는 여행이 과연 휴식이 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런 여행에 의외의 순간이 있을 리 없다.
전날 내린 눈 때문에 차가 거북이 운행을 하는 바람에 밤늦게야 도착한 부석사의 고즈넉한 풍경은 무려 30년이 지났음에도 잊히지 않는 내 소중한 기억 중 하나다. 그날 나는 아무도 없는 무량수전 뜰 앞에 앉아 소백산맥 위로 덩그렇게 솟아오른 보름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어느 순간 미(美)라는 것의 한 끄트머리를 붙잡은 듯 가슴이 설?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과 맞닥뜨린 순간 나도 모르던 내 안의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이 또한 여행의 묘미다. 그러려면 계획이 없을수록 좋다. 계획이 없어야 기대가 없고, 그래야 문득 무엇인가와 마주할 테니.
시월이다. 머지않아 지리산은 초록을 잃고 제각각 다른 빛으로 물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또 단풍잎만큼이나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 것이다.
그중 하릴없는 휴식 속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글·정지아(소설가) 201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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