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모든 과거의 영혼이 가로놓여 있다”고 말한 이는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칼라일이다. 그렇다. 책에는 모든 과거의 영혼뿐만 아니라 지혜와 정보 등이 들어 있으며, 그것은 시간적으로 과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재의 일용할 양식이 들어 있으며,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는 지혜가 들어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이자 비평가였던 바슐라르는 “책은 꿈꾸는 걸 가르쳐 주는 진짜 선생”이라고 말했다.
또 고대의 수사학자인 키케로가 언급했듯이 “책은 소년의 음식이 되고 노년을 즐겁게 한다. 번영의 씨앗이며, 즐거움의 원천이다. 또 여행할 적에는 야간의 반려가 된다.”
우리가 책을 통해 얻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선 책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고문진보>에도 이미 나와 있지 않던가. “가난한 자는 책으로 말미암아 부자가 되고, 부자는 책으로 존귀해진다”고 말이다.
이런 말들은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다. 18세기 미국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독서는 정신적으로 충실한 사람을 만들고, 사색은 사려 깊은 사람을 만들고, 논술은 확실한 사람을 만든다”고 했으며, 철학자 데카르트는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 아르헨티나 출신의 저명한 작가 보르헤스는 <책>이라는 소설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인간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들 가운데 가장 놀랄 만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책이다. 다른 것들은 신체의 확장이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시각의 확장이고, 전화는 목소리의 확장이며, 칼과 쟁기는 팔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다.”
<분노의 포도>의 작가 존 스타인벡은 20세기 중반 “현대에 이르러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영화와 레코드 등과 겨루면서 그래도 책이 그 귀중한 특성을 유지하여 왔다는 것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다”라고 말했고, <장미의 이름>을 쓴 움베르토 에코는 20세기 말 팝과 록의 시대에도 여전히 클래식이 살아남았듯이, 디지털 환경에서도 고전적인 종이 책의 의미는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2010년대의 젊은 작가 정용준은 달리 생각한다. ‘허공의 텍스트’(<21세기문학>, 2013년 가을호)에서 종이 책의 죽음을 예감한다. 가상적인 허구 상황에서 정부는 심각한 환경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종이 책제작을 금지하고, 각 도서관에서는 모든 책을 디지털로 전환한다. 그런 상황에 직면한 작가의 고뇌를 그린 소설인데, 여기서 작중 작가는 “책은 문학의 육체와 같아. 둘은 태초부터 이어져 있는 영혼의 쌍둥이 같은 거”라고 말한다. 그런 입장에서 많은 작가들이 종이 책의 부활을 위해 골몰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런데 작가의 관심은 문학을 담을 육체적 매체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책의 내용이 과연 종이를 써야 할 만큼 가치 있느냐 하는 ‘진정성’이라는 반성에 이른다.
문학 책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참으로 많은 책들이 나온다. 종이 책이냐 e북이냐의 구분을 넘어서 우선 책의 진정성이 선행되어야 할 터이다. 평균적인 혹은 하향 평준화된 책이 많이 나올 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앞에서 인용한 여러 선학들의 책 예찬 담론들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수 있다. 기억과 상상력의 수준과 품격을 알게 하는 책들이 추운 겨울철 따스한 꿈을 꾸고자 하는 독자들을 배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책의 진정한 꿈이 계속될 수 있을 터이기에 말이다.
글·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문학부 교수) 2013.11.18
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