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 음식 중에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것이 많지만 강원도의 ‘콧등치기국수’는 그 중에서도 유별난 축에 속한다. 메밀로 만든 굵고 짧은 면발이 먹을 때 콧등을 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그 발상이 기발하다. 콧등치기의 유래에 대해서는 뜨거운 메밀국수를 먹을 때 코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콧등튀기’라고 부르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다른 해설도 있다.
어쨌거나 우리나라의 음식 이름은 대개 음식의 주재료와 부재료, 조미료의 명칭, 요리 방법 등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끔 신선로처럼 요리 도구가 이름에 쓰이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음식 먹는 장면을 이렇게 생동감 있게 묘사해서 작명한 예는 드문데, 그 착상의 재기발랄함이 요즈음 마케팅 전문가들의 네이밍 기법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콧등치기국수는 다른 이름도 많은데 영월에서는 ‘꼴두국수’라고 부른다. 어려웠던 시절에 하도 자주 먹으니까 꼴도 보기 싫다고 해서 그런 호칭이 붙었다고 한다. 콧등치기 못지않게 해학적인 명칭이지만 왠지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서글픈 이름이다. 얼마나 먹기가 지겹고 싫었으면 음식에 그런 이름을 다 붙였을까. ‘꼴두’라는 이름에도 국수가락이 꼴뚜기처럼 시커멓고 못생겨서 그렇게 부르게 됐다는 다른 설명이 있는데, 이 역시 그리 긍정적인 함의가 있는 이름은 아니다. 그 외에 메밀로 만든 반죽을 칼국수처럼 눌러서 늘여 만든다고 해서 ‘느름국’이라고도 한다.
국수 이름의 내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메밀은 배고프던 시절 주린 배를 채워주던 구황작물이었다. 척박한 땅에서도 싹이 잘 트고 생육기간이 짧아 예전부터 먼저 재배한 작물이 흉작인 경우 비상 작물로 많이 재배되었다. 옛날 강원도의 메밀 재배는 주로 화전에서 이루어졌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저술한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도 “북쪽은 회양에서 남쪽은 정선까지 모두 험한 산과 깊은 골짜기이며, 물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화전을 많이 경작하고 논은 매우 적다”고 했다.
그러니 미곡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그 시절 “정선 처녀들은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거나 “딸 낳거든 평창으로 시집보내 쌀밥 실컷 먹이라”는 말이 지역주민들 사이에 다 회자되었겠는가.
1970년대 중반 정부의 정리시책으로 인해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화전은 산간지방 주민들의 호구지책이었으며 메밀은 그들의 생계 유지를 위한 주요 작물의 하나였다.
세종 때 간행된 재난 시와 춘궁기의 대책을 기록한 서적 <구황벽곡방(救荒?穀方)>에도 구황작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정조실록>에도 “재해를 입은 곳에 구례(舊例)를 비추어서 메밀을 대신 심으라고 명하였다”는 대목이 보인다. 메밀에 관한 기록은 13세기에 출간된 의약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처음 등장하는데 실질적인 도입은 그 이전일 것으로 짐작된다. 재미있는 것은 메밀국수가 강원도 산간사람들에게는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지긋지긋한 음식이었지만 양반들은 별식으로도 먹고 선사품으로도 썼던 모양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집의 문집인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에는 효자로 유명했던 그가 아버지 김장생이 좋아하는 메밀국수를 사흘마다 올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19세기 말의 공인 지규식이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는 대갓집의 잔치에 메밀국수를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곳곳에 적혀 있다. 정선군 아우라지역 앞의 ‘청원식당’과 정선역 인근의 ‘한치식당’은 콧등치기국수로 알려진 집들이고 영월의 ‘신일식당’은 꼴두국수로 유명하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201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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