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계절을 따라가는 것인지 깊은 가을, 몸과 마음이 온통 붉다. 숲이 그렇고 산이 그렇고 길이 그러니 마음 또한 그렇다.
뜨거워서 붉은 것이 아니라 차가워서 붉다. 붉지 않으면 이 깊은 가을을 견뎌낼 수가 없다. 붉게 떨어져야 살아남는 계절이다. 기어이 죽어야 살 수 있는 순환의 고리에서 예외란 없다. 그 짙은 소멸의 붉음 속에서 고집불통으로 엉켰던 마음도 한꺼풀 옷을 벗어야 할 때다.
어딜 가도 사람 많은 단풍철, 너나 할 것 없이 알록달록 무지개색으로 나들이 옷을 차려입은 관광객에 치여 정작 가다듬고 싶던 마음 한 자락 부려놓을 곳을 찾기가 어렵다. 사람들 드문 곳 어디에라도 숨어들고 싶은 이맘때 단풍놀이에서 살짝 벗어난 홍천의 깊은 마을로 들어간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가끔은 더 이상 구경꾼이나 이방인이 아니라 그들의 땅을 함께 밟고 사는 사람으로 그곳을 만나고 싶을 때가 있다. 무슨 핑계를 대고라도 한 열흘, 아니 사나흘 무작정 눌러앉아 있고 싶은 곳, 살둔마을이 바로 그런 곳이다. 오죽하면 마을 이름이 ‘살 만한 둔덕’, ‘살둔’ 일까.
완행버스 타고 한 고개 두 고개 ‘산속의 오지’
홍천 시내에서 살둔마을로 들어가려면 서울에서 홍천 왔던 거리만큼 더 가야 한다. 홍천버스터미널에서 직행버스를 타도 한 시간, 그나마 완행버스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 유랑하며 갈라치면 살둔마을까지 한 시간 반은 족히 걸린다.
홍천 시내에서 살둔마을로 가는 이 길도 1990년대 초에 뚫린 길이라 하니 그 전엔 정말 오지 중 오지였을 테다. 해발 1,500미터가 넘는 산들에 둘러싸인 살둔은 <정감록>에 숨어 살기 좋은 곳으로도 이름을 올렸을 만큼 깊다.
버스를 탄 몸이 이리 휘청 저리 휘청 갈피를 잡지 못한다. 숱하게 고개를 넘고 간간이 마을을 지난다. 쭉 뻗은 도로 같은 것은 없다. 멀미가 날 만큼 이리 돌고 저리 도는 버스가 직선을 향하던 고집스러운 마음을 은근히 풀어놓는다. 오랜만에 구부정 돌아가게 만든다. 속력을 내려야 낼 수도 없고 내서도 안 되는 길 앞에서 스스로 줄이지 못했던 인생길의 속도가 슬며시 줄어든다.
가는 길에 재를 두어 번 넘는다. 옛날이라면 봇짐지고 걸어서 넘었을 재다. 모터를 단 거대한 상자를 타고 가만히 앉아 쉽게 넘는다. 창밖으로 비치는 광경은 여행의 서막을 알린다. 산골에 기대 사는 사람의 모습들이나 스쳐 지나가는 시골마을의 풍경이 시나브로 딱딱했던 마음을 몰랑몰랑하게 만든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 달리다 보면 마침내 산속에 폭 안긴 살둔마을에 닿는다. 살둔마을에는 40여 가구가 산다. 사실 토박이는 별로 없다. 남아나지 못했다.
“지금은 거의 외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그나마도 3분의 1정도는 별장이나 세컨드 하우스로 이용하는 사람들이고요. 두메산골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옛날 사람들은 거의 떠나고 없어요. 가난한 토박이들이 견디지 못하고 떠난 자리에 외지인이 들어와 현대식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마을이 유명해지면서 땅값도 많이 올랐어요. 주인 없는 땅이 없죠. 이제 가난한 시골마을이 아니라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오는 마을이 됐어요.”
살둔에서 나고 자랐다는 살둔마을 이태호 사무장의 말이다.
그 역시 젊은 날 도시로 나가 살다가 살둔을 잊지 못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이것저것 마을 일을 도맡아 하며 살둔에서의 제2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추위와 가난을 등지고 마을을 떠난 사람들, 그리고 도시와 경쟁에 지쳐 순수한 자연을 찾아 들어온 사람들, 그들이 서로 자리를 바꾸는 사이 세월이란 놈은 옛 산골마을의 허름한 집들을 모두 현대식 건물로 바꾸어 놓았다.
흙집, 초가집을 기대하고 왔던 내가 바보인가. 하지만 마을을 둘러싼 자연만큼은 아직 건재하다. 맑게 흘러내리는 내린천과 살둔을 휘돌아 나가는 살둔계곡, 마을을 둘러싼 방태산 줄기의 산자락과 그에 걸맞은 맑은 바람과 햇빛은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폐 깊숙한 곳까지 치고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 역시 아직 그대로다.
캠핑·펜션·민박, 어디든 마음 가는 대로
살지는 못하더라도 살둔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은 꽤 여러 가지다.
폐교를 활용해 만든 생둔분교 캠핑장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은 어떨까. 오지에서의 캠핑은 자연 속에 오롯이 묻혀 주말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캠핑장 옆 살둔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사이트 구획이 명확한 다른 캠핑장에 비해 생둔캠핑장의 매력은 무엇보다 자연스러움에 있다. 학교 운동장과 계곡 주변으로 원하는 곳에 텐트를 치면 되는데 내 자리, 네 자리가 따로 없다.
한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하고 평일에도 꽉꽉 차는 여름 성수기와는 달리 가을부터는 사실 주말에도 캠핑객이 드물다. 조용한 시간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제격이다. 자전거도 무료로 빌려주니, 인근으로 한가롭게 자전거 산책을 해도 좋다. 캠핑장의 하루 이용료는 텐트 1동당 평일엔 2만5천원, 주말과 성수기엔 3만원이다. 다만 겨울에는 캠핑객이 거의 없어 전기와 온수를 공급하지 않고 캠핑장 사용료도 받지 않는다.
운동장과 계곡 옆을 합쳐 총 30동 정도의 텐트를 칠 수 있는 생둔캠핑장은 살둔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한다. 수익금은 마을의 공동기금이 된다. 옆으로는 펜션 5동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캠핑이 번거로운 때라거나 겨울이라면 펜션에 머물러도 좋다. 삼나무로 지어져 실내에 앉아 있어도 짙은 나무 냄새를 맡으며 자연에 안긴 듯 쉴 수 있다. 여름엔 펜션에 머무는 여행객에게 특별히 캠핑사이트 한 동도 무료로 대여해 준다.
그 옆, 독특한 느낌의 살둔산장에서도 살둔마을의 정취를 느끼며 머물 수 있다. 산장은 일본식 가옥과 사찰이 혼합된 형태로 1층엔 방 3개가 있고 2층엔 차를 마시며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거실이 마련되어 있다. 마당에서 캠핑도 할 수 있다. 1년 내내 캠핑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는데 사이트 1개당 평일엔 3만원, 주말엔 4만원이다.
마을 사이트에 들어가면 살둔마을 민박도 취향에 맞게 예약할 수 있다. 살둔에 잠시 머무는 방법은 이렇듯 여러 가지다. 잠시 머물다 가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곳이 살둔이다.
살둔에 와 본 이들은 말한다. 교통이 불편해서, 오지여서 좋다고. 그래서 정말 오고 싶은 사람만 찾아오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미 도시에 부려놓은 삶을 하루아침에 바꾸지는 못하지만 어느 때 한가로이 살둔에 안겨 인생길의 온갖 피곤을 잊어보는 건 어떨까. 문득, 소복이 눈 내린 살둔마을의 겨울이 궁금해진다.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 2013.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