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의 시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 감탄하는 요즘이다. 몇 달 전의 혹서와 혹한쯤은 능히 보상해 줄 만한 하늘이요 푸르름이다. 시구가 저절로 이어진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 ‘소년’ )
하늘이야 원래 천변만화, 누구도 단정 지을 수 없는 자유 그 자체다.
그러니 누구라도 푸르름을 원하는 대로 누릴 수는 없다. 사실 이는 단순히 ‘오늘의 날씨’로 요약되는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 다시 말해 푸르른 하늘을 보려는 자신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 의지는 언뜻 간단한 듯도 싶다. 고개만 들어올리면 되니까. 하지만 하늘 한번 쳐다보기가 쉽지 않은 팍팍한 우리네 삶. 그 간단한 일이 언제 쉬웠던가.
윤동주 시인도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이라 노래했다. 시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연못을 들여다보듯이, 아니 책을 들여다보듯이, 아니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이 그렇게 보고 있다. 그래야 얼굴도 손바닥도 온몸 가득히 푸르러진다. 그래야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비로소 보인다.
순이는 어디 있을까. 눈을 떠도, 다시 감아도 순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올 가을의 푸르름은 어떻게 만끽할 수 있을까. 삶이란 그리움으로 시작하니 이제 직접 자신의 순이를 찾아야 한다. 찾아서 얼굴을 어루만지고 볼을 쓰다듬으며 손금을 들여다보듯이, 그리움의 벽을 넘어 황홀함의 삶으로 몰입해야 한다. 삶이란 그리움을 넘어야 구체적으로 완성되는 법. 자신의 순이를 만나야 한다. 홀로 책을 읽고,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새롭게 서로 포옹하라.
꼭 고개를 들고 눈으로 보아야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느 경지가 되면 눈을 감아도 보인다. 하지만 디지털 제국은 0과 1의 조합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모니터 속으로 파묻게 하고 있다. 척추는 어느새 휘어지고 주위에는 어느새 아무도 없다. 인터넷의 화려한 바다는 침묵과 익사로 이어지기 일쑤다. 척추가 휘어져 직립하지 못하는 인간, 모니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인류가 보인다. 그러니 요즘 같은 푸르른 가을, 허리를 쫙 펴서 척추를 곧추세우고 하늘을 황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지구 반대편의 어두운 하늘, 어느 한 편의 잿빛 하늘, 또 어느 한 편의 우울한 하늘들도 보일 것이다. 신동엽 시인이 노래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으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네가 본 건, 먹구름 / (중략) /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
쇠항아리(하략)”(‘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그러니 이제 눈이 부시게 하늘을 뚫어질 듯 들여다보라. 눈이 부시도록 멋지게 온 세상의 하늘을 만들라. 진정으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단순히 눈이라는 시각 기관의 이상 현상이 아니라, 너무나 감동적이고 놀라운 황홀함의 순간을 뜻한다. 하여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라. 눈앞에 있는 것들에 휩싸여 늘 잃어버리고 언제나 잊어버리는 그리운 사람, 그대 자신을 찾으라.
글·허병두(서울 숭문고 교사) 2013.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