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얼은 기술직 종사자, 관청 서리, 지방 향리와 함께 중인(中人)의 한 축을 형성한 신분이었다. 양반의 첩 자손이었던 서얼들은 양반 중심 사회의 대표적인 희생양이었다. 양반의 특권을 소수만 갖게 하기 위해 적자(嫡子)에게만 그 특권을 주고 서얼은 중인으로 전락시켜 신분적 차별을 가한 것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개혁군주 정조는 서얼 문제가 심각함을 인식하고 1777년(정조 1년) 서류(庶類·서얼)들을 소통(疏通)시킬 방도를 강구하여 절목(節目)을 마련할 것을 지시하였다. 서얼들이 청직(淸職)이라고 지칭되는 주요한 기관에는 진출할 수 없음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시정책 마련을 지시한 것이다.
정조는 하교에서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를 설립한 규모에 있어 명분(名分)을 중히 여기고 지벌(地閥)을 숭상하여 요직(要職)은 허통(許通)시켜도 청직(淸職)은 허통시키지 않는 것으로 이미 옛사람이 작정(酌定)하여 놓은 의논이 있다. 지난해 대각(臺閣)에 통청(通淸)하게 한 것은 실로 선대왕께서 고심한 끝에 나온 조처였는데 그 일이 구애되는 데가 많아 도리어 유명무실한 데로 귀결되어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다”라고 뜻을 토로한 바 있다.
이어 “아! 필부(匹夫)가 원통함을 품어도 천지의 화합을 손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인데 더구나 허다한 서류들의 숫자가 몇 억(億) 정도뿐만이 아니니 그 사이에 준재(俊才)를 지닌 선비로서 나라에 쓰임이 될 만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라고 통탄하면서 능력이 있는 서얼들의 적극 등용을 지시하였다.
정조의 지시에 의해 마련된 1777년의 서얼 허통 절목은 서얼의 신분상승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법이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서얼에 대한 차별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면서 서얼은 중인으로 완전히 고착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서얼들은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처럼 아버지가 있으되 아버지라고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신분 차별에 불만을 품은 서얼이 조직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사건은 1613년 일곱 명의 서얼들이 주도한 은상(銀商) 살해 사건이었다. 이들 서얼의 거사는 실패로 끝났지만 <홍길동전> 저술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서얼들은 자신들도 양반처럼 관직에 차별 없이 등용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얼 허통 상소문을 계속 올렸다.
그러나 인조, 현종, 숙종 연간 이들의 요청은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조 대에 이르러 서얼 허통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숙빈 최 씨가 궁중의 무수리 출신으로 후궁이 되어서인지, 영조는 서얼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1772년(영조 48년) 영조는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내려 서얼을 요직에 등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서얼도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법률로 다스리도록 하는 등 서얼의 차별을 없애는 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영조의 서얼 허통 정책을 계승한 정조는 1777년 서얼 허통 절목을 마련하여 서얼의 관직 진출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최고의 학문 기관인 규장각에 능력 있는 서얼들을 대거 등용했다.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이 그들로서, 이들은 규장각의 핵심요직인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되어 사검서(四檢書)로 칭해졌다.
정조 시대 서얼 출신 학자들은 조선 후기 북학(北學) 수용과 문화 운동의 주역이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19세기에도 이어져 서얼 출신 실학자 이규경은 동도서기(東道西器 : 동양의 도를 바탕으로 하고 서양의 기술을 수용함)를 바탕으로 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백과사전을 남겼다. 서얼들의 노력은 1859년 대구의 달서정사에서 간행된 <규사(葵史)>에서도 확인된다. <규사>는 해바라기를 뜻하는 ‘규(葵)’자를 넣어 해를 향한 해바라기처럼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변함 없음을 약속한 서얼들의 역사 기록이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3.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