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지니 뜨끈뜨끈한 국밥 생각이 절로 난다. 옛날부터 탕반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는 별의별 국밥이 다 있지만 서민들과 친근하기로는 콩나물국밥 만한 것이 없다. 우리나라 콩나물의 역사는 길다. 문헌에 나오는 최초의 기록은 고려 고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236년에 간행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콩을 싹 틔워 햇볕에 말린 대두황(大豆黃)이 약으로 이용된다”는 구절이 보인다. 식용으로 콩나물을 먹은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유추되는데 10세기 초 고려의 개국공신 무열공 배현경(裴玄慶)이 식량 부족으로 허덕이던 군사들에게 콩을 냇물에 담가 콩나물을 만들어 배불리 먹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후기에 출간된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대두황의 가루를 약으로 삼아 먹으면 곡식을 먹지 않고서도 흉년을 넘길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이후에 나온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가난한 자는 콩을 갈고 콩나물을 썰어서 한데 합쳐 죽을 만들어 먹는데 족히 배를 채울 수 있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도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을 때 콩나물을 지진 막장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어 콩나물이 예전부터 우리 조상들의 구황식품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콩나물은 두아채(豆芽菜), 숙아채(菽芽菜), 두아, 황두아채 등으로 불리다가 1859년에 간행된 <농가월령가>에 콩나물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나타난다. 콩나물은 우리나라에서만 먹는다는 주장도 있다. 언론인 이규태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콩나물 먹는 전통이 없다. 그들이 먹었다면 콩나물이 아니라 녹두 싹인 숙주나물이었을 따름이다. 동양에서도 숙주나물을 먹은 역사는 길지만 콩나물을 먹는 전통은 문헌상으로 보아 우리나라뿐”이라고 했다.
콩나물국은 해장국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데 콩나물에 함유된 아스파라긴이 피로 회복과 알코올 분해를 촉진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술이 덜 깬 아침에 뜨거운 콩나물국을 들이키며 “시원하다”를 연발하는 건 서양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만의 문화가 아닐까.
일찍이 육당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에서 콩나물을 전주의 명식으로 꼽기도 했지만 콩나물국밥 하면 역시 전주가 본고장이다. 전주의 콩나물국밥에는 계보가 다 있다. 뚝배기에 콩나물국과 밥을 말아 펄펄 끓여서 내는 ‘전통식’이 있고 국으로 밥을 토렴한 뒤 말아서 내는 ‘남부시장식’이 있다. 전통식은 시원한 맛이 일품이고, 덜 뜨거운 남부시장식은 콩나물이 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별미다. 달걀도 전통식은 끓는 국에 풀어서 내고 프라이를 하나 더 곁들이는 데 반해 남부시장식은 반숙한 수란을 따로 낸다. 전주 사람들은 이 수란에 뜨거운 국물을 몇 숟갈 붓고 김을 잘게 부숴 넣은 뒤 같이 먹는다.
전통식의 대표주자는 고사동의 ‘삼백집’이고 남부시장식의 대표주자로는 경원동의 ‘왱이집’과 중화산동의 ‘현대옥’을 꼽는다. 서울에서는 봉천동의 ‘완산정’과 북창동의 ‘전주유할머니비빔밥’이 콩나물국밥으로 이름난 집들이다.
콩나물국밥에는 막걸리나 술지게미에 대추, 계피, 감초, 흑설탕 등을 넣고 끓여서 만드는 달콤한 모주를 한잔 곁들여야 제격이다. 모주는 조선시대 광해군 시절에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 씨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생계를 위해 술지게미로 술을 걸러서 내다 판 것이 유래라고 한다.
제주도 사람들이 이 술을 대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이라고 해서 대비모주(大妃母酒)라고 부르다가 모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20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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