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창작과 실기수업에서는 학생들의 창작물을 합평하는 경우가 많다. 합평에서 몇 번 비판받은 학생들은 이내 기가 죽어 창작을 포기한다. 졸업 때까지 해도 안 되는 학생들은 “저는 재주가 없나 봐요”, 한탄하며 재주를 타고난 몇몇을 부러워한다. 안 되는 모든 이유와 변명이 자신의 ‘둔재(鈍才)’에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김득신(1604~1684)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둔하기 짝이 없어 열 살에야 겨우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시절 흔히 읽던 <십구사략(十九史略)>의 첫 단락은 겨우 26자에 지나지 않았는데, 사흘을 배우고도 입조차 떼지 못했다. 주변에서 저런 둔재는 처음 보았다고 혀를 찼지만 아버지는 늘 아들을 두둔했다.
“나는 저 아이가 저리 미욱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니 그것이 오히려 자랑스럽네. 하물며 대기만성이라 하지 않았는가?”
아버지의 성원에 힘입어 김득신은 나이 스물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 한 편을 지을 수 있었고, 뒤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런 뒤에도 그는 길을 걸을 때나 남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밤에는 늘 머리맡에 책을 두고 잤다. 그렇다 하여 둔재가 천재로 변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홍한주(1798~1866)의 <지수염필>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김득신은 지혜가 부족하고 재주가 몹시 노둔했는데도 외워 읽기를 매우 부지런히 했다. 독서록이 있었는데 천 번을 읽지 않은 것은 기록에 올리지도 않았다. 사마천의 <사기> 중에 ‘백이전’ 같은 것은 1억1만3천번을 읽기에 이르렀다.
뒤에 한번은 말을 타고 어떤 사람 집을 지나가는데, 책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글이 아주 익숙한데, 무슨 글인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
말 고삐를 끌던 하인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부학자 제적극박 어쩌고저쩌고 한 것은 나으리가 평생 맨날 읽으신 것이니 쇤네도 알겠습니다요. 나으리가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김득신은 그제서야 그 글이 ‘백이전’임을 깨달았다.
이렇듯 후대에까지 둔재로 널리 이름을 떨친 김득신이지만 만년에는 시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타고난 둔재도 1억1만3천번(현재로 따지면 11만3천번)을 읽어내는 노력과 끈기로 일어선 것이다. 같은 책을 11만번이나 읽다니. 게으른 범인으로서는 흉내낼 수 없는 노력이다. 이렇게 표현해도 용서된다면 무식하다 싶은 노력이다. 그러나 무식한 노력은 천재를 이긴다. 김득신이 될 때까지 해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격려 덕분이었다. 스물 넘어 처음 지은 시가 오죽 변변찮았을까. 그러나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며 격려했다.
“더 노력해라. 공부란 꼭 과거를 보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격려 덕분에 남보다 늦었지만 김득신은 과거에 급제했고, 남들보다 훨씬 늦었지만 당대의 문장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둔재를 극복할 수 있었다. 믿음과 격려는 노력에 날개를 달아주고, 자신을 뛰어넘게 해 주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
글·정지아(소설가) 201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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