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영화나 텔레비전을 볼 때면 사람들이 마스크 없이 돌아다니는 장면에서 이질감을 느끼거나 즐거웠던 한때를 떠올리게 된다. 며칠 전에는 허리케인을 소재로 한 액션영화를 봤다. 엄청난 크기의 허리케인이 다가오는 가운데 대피 명령이 내려진 한 마을의 경찰과 프로그래머, 퇴역 공무원이 손잡고 해킹으로 낡은 지폐를 폐기하는 곳에 침입해 돈을 훔쳐 달아나는 내용이다.
돈을 훔치는 내용이야 너무 많이 봐서 흥미롭지 않았다. 대신 허리케인 정중앙에 60km 반경의 원이 있고 그 안에 태양이 비추며 잠시 정적이 머문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그 원은 허리케인의 움직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고 그곳에서 빠져나가려면 허리케인의 소용돌이를 지나야만 한다. 허리케인이 존재하는 한 항상 그 안에 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기상학자의 말과 함께 어떤 이들은 마침내 그 정적이 왔을 때 반전을 기획하고 다가올 소용돌이를 준비한다.
제주도에 살면서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자연에 대해 숙연해졌다는 점이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는 한낱 휴지 조각이 되는 현실을 미탁, 솔릭, 볼라벤, 제비, 마리아, 버빙카, 다나스, 타파, 링링 등 다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태풍을 겪으며 절감했다. 하나가 오면 다음 것이 오고 다음 것이 지나가면 그 다음 것이 온다.
도시에 살았을 때는 태풍은 그저 날씨 뉴스에서 보던 섬나라 이야기였을 뿐이다. 하지만 막상 바다 한가운데 살다 보니 태풍이나 폭우, 심지어 가뭄까지 얼마나 시시각각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깨달았다. 옆 동네 농사가 망하면 인심도 바뀌는 법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해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태풍이 들이닥칠지 모르기에 결국 잠자코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바라며 기도할 수밖에 없다. 태풍을 경험하면서 땅속 집이나 지붕에 무거운 돌을 얹은 건축 양식을 이해하게 됐고, 경건한 마음으로 어떤 존재를 향해 미래의 날씨를 부탁하는 일도 공감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영화처럼 코로나19라는 소용돌이에 떠밀렸고 누군가는 떠밀려나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누군가는 소용돌이의 최전선에서 정중앙에 있는 원의 정적을 기다리며 목숨을 바쳐 다가올 다음 소용돌이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뉴스에서 목숨을 바쳐 환자를 돕는 사람을 볼 때면 다시금 영화 속 한 장면이 기억난다. 소용돌이를 뚫고 나갈 기회가 있었지만 되돌아와 누군가를 구출하는 장면 말이다. 아직 이 세상에서 살 만하다고 믿게 만드는 장면이다. 더 큰 회오리가 오기 전 기회가 있을 때 돌아와서 손 내미는 사람의 손을 잡지 않았을 때의 결말은 불 보듯 뻔하다. 적어도 지금 우리에게 손 내미는 사람들이 있으니 다행이다.

윤진서 배우_ 2003년 영화 <올드보이>로 데뷔 후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책 <비브르 사비> 등을 썼다. 최근 유튜브 채널 ‘어거스트 진’을 개설했다. 자연 친화적인 삶을 지향하며 제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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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