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로는 엄연한 사실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제주는 섬인 동시에 산이다. 화산섬이다. 포구에 산책을 나가거나 해변에서 먼 바다를 바라볼 때 뒤쪽에 산이 있음을 망각하곤 하는데 산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제주를 표상하는 한라산 외에도 마을 뒷산처럼 곳곳에 자리 잡은 오름이 360여 개나 된다. 하루에 한 곳씩 매일 오름을 오른다고 해도 1년가량 시간이 걸린다.
오름은 화산분출물에 의해 형성된 작은 산이나 봉우리를 뜻한다. 엄연히 산이다. 제주를 제주답게 하는 자산이다. 언뜻 형태가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오름은 하나도 없다. 저마다 고유한 이름이 있고, 높이가 다르고, 오르는 길이 다르고, 식생이 다르고, 풍경이 다르고, 스치는 바람이 다르다. 내가 가본 오름 중 몇 곳만을 떠올려 봐도 그 기억과 감흥이 중첩되는 곳은 없다.
람사르습지에 지정될 만큼 원형 그대로의 자연환경과 둘레길이 인상적인 물영아리오름, 가을 억새철 오름의 여왕으로 불리며 부모님과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따라비오름, 긴 탐방로를 자랑하며 정상에서 한라산 전경을 그윽하게 조망할 수 있는 큰노꼬메오름은 오름에도 선택지가 있음을 말해 준다. 방송을 타고 유명해진 금오름은 굉장히 묘한 곳인데, 제주가 당면한 현실을 압축해놓은 여행지다. 금오름은 일몰이 다가오는 시간 가장 오묘하고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제주의 고질적인 축사 악취 문제를 목도할 수 있는 곳이다. 또 분화구까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몇 안되는 오름이라 그만큼 훼손도 많은 실정이다.
오름은, 오름을 오른다는 것은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짧은 시간 삶의 속성을 자각하게 한다. 이게 쉬워 보여도 쉽지 않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 20분이면 충분한 오름도 있지만 1시간 넘게 소요되는 곳도 있다. 만만하게 보고 접근했다가 낭패를 본다. 오름에는 꽃길이 펼쳐지지 않는다. 도처에 진드기 같은 해충과 가축 배설물이 도사리고 있다. 접근할 수 없는 통제구역도 많다. 이윽고 정상에 오르면 해냈다는 성취감과 개방감에 도취된다. 한동안 눈앞에 펼쳐진 그림 같은 장면들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하지만 정상에는 그늘이 없다. 쉴 곳이 없다. 강한 햇살과 매서운 바람이 쉴 새 없이 파고든다. 이내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걸 인지한다. 오르막길은 오르막길대로 힘들고 내리막길은 내리막길대로 힘들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내려와서는 오름에 그만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고는 어느새 망각의 주인이 되어 다시 오름으로 향하는 나를 발견한다.
복잡한 마음을 오름에 내려놓는다. 오름은 상승을 위해서가 아닌 잠시 멈추기 위해 존재함을 깨닫는다. 나를 넘어 내 주변을 돌아본다. 그리고 염원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좇기보다 내가 있는 곳이 아름다울 수 있기를. 삶에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기를.

우희덕 코미디 소설가_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