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으로 향하는 34번 국도에서 방향을 튼다. 수곡교가 임하호를 가로지른다. 아기(애기)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마을을 둘러싸 수곡이다. 그 이름을 붙인 다리는 길이에 비해 폭이 좁다. 차량 2대가 겨우 교차해 지난다. 다리를 건너 호숫가의 길을 따른다. 나른한 봄기운이 물가에 번진다. 길목에는 서낭당과 망향정이 물속에 잠긴 옛 마을을 그리며 섰다.
임하호는 임하댐이 들어서면서 만든 인공호수다. 1993년 임하면과 임동면 일대에 조성됐다.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답게 수몰지에는 옛 마을이 적잖다. 무실마을과 지례마을(예술촌) 등이다. 그 가운데 무실마을은 전주 류씨의 집성촌이다. 15세기 말에 류성(柳城)이 정착한 후 후손들이 약 600년 동안 살아왔다.
마을은 댐이 들어서기 몇 해 전 아기산 자락의 현 위치로 이촌했다. 수애당(경상북도 문화자료 56호)도 1987년에 옮겨 복원했다. 물가와 가까운 위치다.
수애(水涯)는 독립운동가 류진걸의 호를 땄다. 수애당은 그가 1939년에 부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 지었다. 지금은 그의 손자 류효진(50)씨와 부인 문정현(46)씨가 두 자녀와 함께 산다.
한옥의 기하학적 아름다움과 기품
류씨는 수애당 안채의 안방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성장기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집이다. 문씨는 제주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랐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두 사람은 17년 전 귀향했다.
집도 주인도 안동의 유명한 고택들에 비하면 젊은 층에 속한다. 그럼에도 명성이 자자하다. 일찌감치 객들에게 대문을 연 까닭이다. 수애당이 전통생활체험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게 벌써 10여 년이다. 손님맞이는 오히려 다른 한옥보다 앞선다.
대문에 다다르기 전 집과 접한 길가에서 걸음이 멎는다. 임하호에서 바라본 아기산 쪽의 풍경이다. 먼저 중간채의 바깥으로 담장이 경계를 이룬다. 그 주위로는 텃밭을 둘렀다. 그러므로 적당한 거리감이 생긴다.
낮은 담 너머 집 안에는 또 얼마간의 거리를 둔 중간채의 후면이다. 칸칸의 구분이 명확하고 각 방의 창 위로는 수평의 기와선이 가지런하다. 빗금 진 처마는 줄을 지어 도열해 수평의 지붕을 이룬다. 그 위로 살짝 고개를 내민 건물이 안채다. 중간채와 더불어 두 건물의 용마루가 평행으로 중첩되며 조화를 이룬다. 한옥이 갖는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다.
그 절정은 가장 뒤쪽에 병풍처럼 선 아기산과 두루미봉이다.
짙은 초록이 고택의 주변을 가득 채운다. 자연을 벗 삼은 한옥의 매혹이다. 돌아보면 다시 임하호의 물길이 유유하다. 집 안으로 발을 들이기 전에 이미 배산임수를 실감한다.
서편의 담을 돌아 정문에 이른다. 전형적인 양반가의 풍채다.
정면 5칸의 솟을대문이 위풍당당하다. 담장에 박힌 호박돌도 제시간을 연출한다. 대문채는 대문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외양간과 창고를, 오른쪽에 통간 온돌을 두었다. 중문과의 사이에는 자그마한 장방형의 행랑마당이 있고 곧 안채와 중간채의 마당으로 길이 열린다. 그에 앞서 또 한 번 발길이 멈춘다. 열린 대문 안쪽으로 각 채의 지붕이 겹치며 펼쳐진다. 건물의 측면과 정면, 중문의 처마가 교차하며 다시금 한옥의 미를 탐하게 만든다. 담장에서 바라본 수평의 장관과는 다른 운치다. 그 품으로 느릿하게 첫걸음을 낸다. 비로소 마당에 선다.
수애당의 본채는 크게 서쪽의 아기산을 등진 ‘ㅡ’자 형의 안채와 임하호에 가까운 ‘ㄱ’자 형의 중간채로 이뤄진다. ‘ㅁ’자 형의 나머지 면이 남쪽을 향해 난 대문채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다. 팔작지붕이 멋스럽다.
널찍한 대청마루를 중심에 두고 좌우로 방들이 위치한다. 대청의 바닥은 우물마루다. 정(井)을 그리며 반듯하게 깔렸다. 윤택하고 반들거리는 면면이 주인장의 바지런함을 엿보게 한다.
중간채는 정면 10칸의 구조다. 북쪽으로 꺾이며 ‘ㄱ’자를 이룬다. 외벽은 담장의 역할도 한다. 남쪽에는 장독대다. 안주인이 직접 담근 장이 익어간다.
온돌 황토방 8개 손님들에게 개방
집 전체의 규모는 원래 지금보다 컸다. 수몰지에서 이전해오며 경사지의 건축을 평지에 얹히다 보니 아쉬움이 남는다. 정침은 2~3미터가 더 높았다. 수애당 뒤쪽에 류씨 종택이 위치해 높이를 맞추다 보니 제 몸을 낮췄다. 중간채도 더 길었다. 솟을대문과 협문 사이의 마당도 안마당 크기였다. 집을 두른 담장 역시 경사지에 있어 계단 형식을 취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빼어난 맵시다. 고래등 같은 99칸 집은 아니지만 춘양목으로 지은 3동 29칸은 틀어짐이 없이 꼿꼿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품도 더한다. 아니나 다를까, 건축가가 운현궁을 보수한 대목수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종종 운현궁의 흔적을 찾아내는 이도 있는데 그러한 까닭이다.
건물의 얼개를 짠 이가 운현궁을 지은 대목수였다면, 마디마디에는 안주인 문정현씨의 손길이 스몄다. 수애당은 안채와 중간채, 문간채의 방 8개를 손님에게 낸다. 모두가 온돌을 깐 황토방이다.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아궁이에 군불을 땐다. 그 또한 까마득하게 잊힌 우리네 문화다. 불을 지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방마다 침구류는 광목천에 목화솜을 넣었다. 침구 위에는 안주인이 직접 수놓은 전통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다. 방의 생김도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100년이 넘은 장과 탁자, 창호지로 만든 전등갓과 자개 장식의 경대 등 가구나 소품을 활용해 공간에 작은 변화를 주었다. 굳이 권하자면 안채의 사랑방이나 중간채의 남쪽 끝에 위치한 작은 방이 좋다. 안채의 사랑방은 남서향의 모서리를 끼고 있어 남쪽과 서쪽으로 문이 났다. 열어두면 산들산들 봄바람이 불어든다.
먼발치에는 임하호가 눈에 찬다. 신선인 양, 한량인 양 무심한 시선으로 누려 안는다. 중간채의 남쪽 방은 마당을 끼고 그 맞은편에 위치한다. 두 사람이 머물기에 알맞은 작은 방이다. 사랑방과 마찬가지로 두 면으로 문이 나 시원스러운 개방감을 자랑한다. 한옥의 문은 격자의 창으로 경관을 품은 액자였던가.
신록이 피는 마당의 풍경과 솟을대문의 전경, 그리고 가까이에 자리한 장독대의 정감까지, 단은 낮아도 기꺼운 시계(視界)다. 그리 마음을 놓으면 이전에 놓치고 지난 세세한 한옥의 선율이 느껴진다. 수애당의 문창살은 그 끝을 투밀이 방식으로 둥글게 깎아 멋을 부렸다. 한층 입체적인 모양을 연출한다.
무심한 짚신·표주박에도 고택의 향기
가구의 이음새마다 받침쇠에 장식용 못으로 쓰는 광두정을 박았다. 무심한 듯 걸려 있는 짚신이나 표주박도 고택만의 향취다.
양반의 느린 팔자걸음으로 주섬주섬 고택의 기억을 탐험한다. 장독대 위에서 된장이 익어가는 눅진한 냄새에 젖고 담장 밑에 막 피어난 매화꽃 향기에 빠져든다. 나른한 봄날의 풍유다. 간간이 청명한 울림도 귓가에 닿는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다. 물고기 한 마리가 허공을 유랑하며 종을 흔든다. 그제야 마당을 쓸고 지나는 바람을 안다. 잊고 지낸 날들이 거기에 있다. 삶은 오래도록 이어져왔고 또 그렇게 이어져갈 것이다. 고택의 평온한 기운이 맘을 어른다.
글과 사진·박상준(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