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1575~1641, 재위 : 1608~1623)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린다. 전쟁을 미연에 방지한 중립외교 정책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반면, 왕통 강화를 위해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한 ‘폐모살제(廢母殺弟)’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외교와 정치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속에서 정작 광해군이 추진한 정책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명이 없다.
사실 광해군이 즉위 직후 단행한 대동법은 기득권층의 반발에 막혀 실시하지 못했던 세제 개편을 본격적으로 단행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시대 농민이 국가에 부담하는 대표적인 세금은 토지에 대한 세금인 전조(田租)와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貢納)이었다. 공납은 농민이 호별(戶別)로 특산물을 국가에 바치는 것으로, 관청의 서리들이 중간에 개입하여 필요한 특산품을 미리 사들여 농민에게 비싸게 받아내는 방납(防納) 혹은 대납(代納)의 폐단이 컸다. 임진왜란 후 공납제의 폐단은 더욱 커져서 호피(虎皮) 방석 1개의 대납 가격이 쌀 70여 석이나 면포 200필까지 치솟기도 했다.
전란 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토지조사 사업과 백성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세제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광해군은 1608년 왕위에 오른 후 공납제도 개혁에 착수하였다. 광해군의 구상을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었다.
<광해군일기>에는 광해군 즉위년 5월 7일에 대동법을 추진할 기관으로 선혜청을 설치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원익은 “매년 봄과 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에 보내고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여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광해군은이 건의를 받아들여 경기도에 처음으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대동(大同)’이란 용어는 신분적 차별이 없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뜻하는 말이다.
기존에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것을 쌀로 대신하여 납부하는 것이 대동법의 핵심이었다. 특히 기존에는 호별로 부과하는 방식이었으나, 부과 단위를 토지 결수에 둠으로써 땅을 많이 소유한 지주의 세금부담을 크게 하였다. 대동법 체제에서의 세금은 처음에는 토지 1결당 16말씩이 부과되었으나 점차 조정되어 1결당 12말로 확정되었다.
대동법은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한 후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으나, 지주와 중간 상인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광해군 때는 경기도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그쳤다.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지주들의 저항, 산간지역이나 해읍(海邑) 지역에 적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 등으로 여러 차례 논란에 부닥쳤다.
효종 때에 김육은 ‘안민(安民)’을 강조하면서 충청도 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실현시켰고, 이후 대동법은 숙종 대인 1677년에 경상도, 1708년 황해도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대동법이 지세(地稅)로 통합될 때까지 존속하였음을 고려하면 광해군 때 첫 단추를 끼운 대동법의 역사는 오랜 기간 계속되었음을 볼 수가 있다.
대동법은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 안정된 삶을 보호하게 하는 정책으로 당시에도 분명히 추진해야 할 세제 개혁이었다. 그런데도 시행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던 것은, 세금의 부과 단위가 호별에서 토지 결수로 되면서 땅을 많이 보유한 지주들이 강하게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부자에 대한 증세, 소득세 과표(課標) 구간의 조정, 종합부동산세의 신설 등 세금 정책에 대한 정부의 고민이 적지 않다. 대동법 시행을 둘러싼 진통을 현재의 세제 개편과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