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1,original,right[/SET_IMAGE]‘늘 그립고 늘 보고픈 고향둥근 달덩이 하늘에 두둥실 떠오르는 추석이 다가오면 발길이 가기도 전에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습니다.’
(시인 용혜원의 ‘추석에 고향 가는 길’에서) 네 명의 ‘고향 작가’들이 우리의 추석 이야기를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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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소설가)
우중충하던 하늘이 청잣빛으로 변하고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밤이면 풀벌레들이 극성스럽게 울어댄다. 초저녁에 밥을 먹고 토굴로 올라오는데 서산 머리에 염소뿔 같은 초승달이 떠있다. 저 달이 둥글어지면 추석이 된다.
머리에 서리 내린 이 풋늙은이가 맞곤 하는 추석은, 언제부터인가 수선스러움 쓸쓸함 외로움 걱정스러움 불안스러움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명절이 되어 있다.
서울 사는 자식들이 천릿길을 달려 아비 어미와 함께 추석 명절을 보내겠다면서 찾아오곤 한다. 전쟁 중의 피난길을 방불하게 하는 교통지옥을 관통하여 전라도 끝자락에 있는 바닷가 마을까지 달려오는 자식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불안하고 조마조마해 견딜 수 없다.
자식들을 내려오지 못하게 하고 우리 부부가 그들에게로 가서 추석을 지내고 내려올까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90세 노모가 계시는데 어찌할 수 없다.
추석 명절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어린 시절 나는 팔월 초승달이 서산 머리에 뜰 때부터 추석을 손꼽아 가면서 기다렸다. 기다림은 희망이고 환희다. 희망과 환희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몸을 새처럼 가벼워지게 한다. 희망과 환희는 날개가 되어 주었고, 나는 두 날개를 십자로 벌리고 골목길을 제비처럼 날아다니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늘 일에 얽매여 살았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어미소를 산으로 끌고 가서 뜯겨야 하고, 송아지와 어미소가 밤에 먹을 풀을 베어 짊어지고 와야 하고, 일요일에는 갈퀴나무를 해와야 했다. 그리고 밤이면 할아버지 앞에서 한문공부를 한두 시간씩 하고, 붓글씨를 써야 했다.
그렇지만 추석날은 소 뜯기러 가지 않아도 되고, 꼴도 베러 가지 않고, 산으로 땔나무도 하러 가지 않고, 어른들의 들일을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그날은 내가 전날 넉넉하게 베어다 놓은 풀을 아버지가 소와 송아지에게 주는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짚신 벗어던지고 새 검정고무신을 신고 새옷을 입고 물엿과 참깨와 알밤 넣은 송편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한재산 너머 장산마을로 시집간 큰누님이 이바지를 해서 올 것이고, 처녀들과 새각시들의 강강술래 굿을 볼 것이고, 뒷동산에서 씨름을 할 것이다.
“추석 달 떴다. 저것이 둥그렇게 커지면 한가위다.”
어머니는 낮에는 들일을 하고 밤이면 호롱불을 밝혀놓고 재봉틀질을 하여 새옷을 지었다. 어른들의 옷은 새로 짓지 않고 전에 입던 옷을 빨아 다람질하면 되지만, 자라는 형과 내 옷은 새로 지어야 했다. 나는 세 살 위 형보다 몸집이 더 컸으므로 형의 헌옷을 입지 않고 나란히 새옷을 입으며 자랐다.
어머니는 추석 전날 송편과 월편을 만들면 곧 그것을 접시에 담아 이웃에 돌렸다. 나는 제비처럼 날아다니면서 그 심부름을 즐겼다. 물론 이웃에서도 송편이 날아왔다.
송편을 배불리 먹은 나는 어머니의 뜨거운 정성과 사랑이 담겨 있는 눈부시게 흰 무명 새옷을 입고 뒷동산으로 가서 씨름을 했다. 달은 휘영청 밝았고, 대여섯 살 꼬마들로부터 시작된 씨름은 점차 머리 굵은 어른들의 씨름으로 바뀌어갔다.
“어구야!”
한판 한판 승부가 날 때마다 함성이 터졌다.
이 땅 사람들이 해마다 추석 전후에 귀성전쟁을 치르곤 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고향에서 지내는 추석을 추석다운 추석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도회에서 살다가 추석에 고향 와서 송편 먹고 성묘하고 되돌아가는 것은, 각박한 문명 속에서 소진한 에너지를 재충전해 가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걱정이 앞선다. 수해로 말미암아 집과 논밭 잃고 과수원 망가져 버리고 잠자리 불편한 그들에게 추석은 얼마나 슬프고 쓸쓸할 것인가.
가능하면 송편을 넉넉하게 빚을 일이다. 이웃을 둘러보고, 제대로 빚어 먹지 못하는 사람들하고 나누어 먹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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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소설가)
한국전쟁이 그친 뒤 몇 해가 더 지났어도 우리 마을은 그 잔혹한 전쟁의 상처를 앓았다. 나와 조무래기 동무들은 인민군 대대가 머물렀던 윤선달집 뒤란과, 미군 전투기의 굉음이 울리면 왱왱대던 사이렌이 숨겨진 마을회관 뒷산에서 기관총 탄피 따위를 주우면서 비속한 유년기의 강을 건넜다.
그때 널리 퍼져 있던 현상을 말하자면 배고픔과 거지 떼, 구멍난 옷, 찌그러진 깡통 밥그릇, 상이군인들의 갈고리 박은 손, 누르스름한 우윳가루가 담긴 성조기가 선명한 깡통, 정신대 갔다 온 중년 여인들이 성병 치료를 위해 피우던 수은담배 연기, 자유당 선전대 여자의 앙칼진 연설 등이다.
무더운 여름이 끝나갈 즈음 어김없이 찾아오는 추석 명절은 그런 지루하고도 우울한 세월의 슬픔을 달래주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문맹을 벗어나기 위해, 알 수 없는 욕망의 충동을 터뜨리기 위해 객지로 흘러나갔던 이들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한 사나흘 머무르다 돌아가면 무겁고 아픈 생존의 고통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때도 고향과 명절은 끝없는 치유와 위안의 약효를 지닌 신의 손길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고향에 남은 부모와 형제들, 이웃사람들도 명절을 고향에 와서 쇠고 난 뒤 떠나는 이들을 산등성이 너머로 보내 놓고 나서야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
그 시절 추석을 한 달여쯤 앞둔 때, 나는 어린 동생을 업거나 걸리고 마을 서쪽 감나무골에 있던 볏논에서 종일 참새 쫓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농민6호’라고 부르는 벼 이삭이 팬 뒤부터 나의 하루는 볏논 부근에서 시작되고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석이 열흘 앞으로 다가오면 벼이삭은 제법 노랑 방울이 짙어지고 고개를 숙이는데, 그때는 참새 떼가 더욱 극성을 부리던 때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어느새 수십 마리 참새들이 벼이삭 위에 몰려들어 아직 설익은 벼이삭을 까먹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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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여! 후여! 나는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깡통을 두드리면서 논두렁을 이리저리 내닫는다. 아버지께서 허수아비 한 쌍을 만들어 논 동서쪽에 세워 두셨다. 허수아비는 보통 아버지의 헌 무명잠뱅이에다 밀짚모자를 쓴 차림새다. 하지만 참새들은 아버지의 옷을 걸친 허수아비의 팔 위에 앉아 어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뭐라 재잘대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농업고에 다니던 형님이 움직이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시누대를 쪼개 둥근 테를 만들고 비료포대 종이를 앞뒤로 붙인 뒤 그 위에 험상궂은 얼굴을 그려놓았다. 둥근 종이얼굴 양쪽에 다시 고무줄을 끼워 장대에 묶어 놓았다. 고무줄을 가느다란 장대 끝에 매단 덕분에 험상궂은 종이 얼굴은 바람이 불 때마다 아래 위로 춤을 추듯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참새들에게는 별반 소용없다. 논가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한참 움직이는 허수아비를 바라보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슬그머니 볏논으로 날아드는 것이다. 부화가 치민 나는 등에 업혀 곤잠이 든 동생을 논가에 눕힌 뒤 깡통을 더욱 세게 두드리면서 참새와의 전쟁을 벌이곤 했다.
이윽고 추석 사흘 전. 아버지는 아직 볏잎이 푸르고 덜 여물었지만 곱게 노랑 방울이 내려앉은 벼를 한 짐 베어 집으로 지고 오신다.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그 위에 ‘앉은홅개’를 차린다. 기계 홅개가 나오기 전 우리 농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벼 타작 기구는 앉은홅개였다. 참빗처럼 촘촘한 무쇠로 만든 이빨을 위로 향하게 삼각대 위에 고정시킨 다음 벼이삭을 이빨 사이로 훑어냈다. 훑어낸 낱알들을 이번에는 가마솥에 넣고 푹 삶아 낸다. 벼가 덜 여문 탓에 그렇게 쪄 말려야 하기 때문이다. 찐 벼를 볕에 말린 뒤에는 다시 절구통에 넣고 찧는 작업이다. 그러면 약간 쭈글쭈글한 벼알이 나온다. 이른바 찐쌀이다. 보통 벼 한 짐에 찐쌀 한 되 가량이 나온다. 그 햅쌀로 추석 명절 아침 차례 때 조상들께 올릴 쌀밥을 지어 올리는 것이다.
추석 차례상에는 여름 내내 자손들이 땀과 정성으로 키운 햅쌀밥을 비롯하여 선홍빛 감도는 대추, 알밤이 오르고 떨감을 소금물에 담가 떫은맛을 지운 침시를 깎아 올리고, 그해 봄고사리며 올콩으로 만든 두부와 산나물들을 그릇그릇 담아 올렸다. 어느 것 하나 정성이 가지 않은 제수는 없었다. 그 어렵던 시절에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았던 것은 그렇게 맞을 수 있는 추석 명절과 지성껏 조상을 섬기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어르신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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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시인)
나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명절이면 늘 사람들을 기다렸다. 내가 20대 때는 또래의 동무들이 마을을 다 떠나 버리고 혼자여서 나는 늘 외로웠다.
추석 하루 전이면 나는 우리 동네에서 한 30분 거리에 있는 작은 버스 정류장까지 동무들의 마중을 나갔다. 객지에서 일찍 온 동무들이랑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우리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서로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하며 놀았다. 아무 이야기나 즐겁고 신나고 재미있었다.
정류장에 정차하는 차에서 사람들은 울긋불긋 많이도 쏟아져 나왔다. 막차가 가고 나면 우리는 푸른 달빛을 차며 들길을 걸었다. 마을은 오랜만에 생기를 되찾았다. 추석날 밤. 아! 그 둥근 달,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야만 했던 청춘, 우리는 이웃 마을에서 열리는 노래자랑 대회에 나갔다. 노래는 뒷전이었다. 객지에서 돌아온 청춘 남녀들의 들뜬 열기는 달이라도 따 올 수 있을 만큼 솟구치고도 남아돌았다. 한쪽에서는 싸움판이 벌어지고, 무대는 노래를 할 때보다 난장판이 될 때가 더 많았다. 노래자랑이 온전하고 완전히 그 막이 내린 날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세월이 갔다. 우리 동무들은 결혼을 했고, 자식들을 거느렸다. 이제 동생들이 추석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때쯤에는 동네마다 콩쿠르가 열렸다. 추석이 되면 우리 동네 허술한 회관 마당에도 무대가 생기고, 상품이 진열되고 낮부터 확성기 소리가 산천을 울렸다. 그때는 마을공동체가 그 끝에 다다를 무렵이었고, 마을 콩쿠르는 객지와 고향에 살던 사람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는 마지막 마을 축제였다. 그 축제는 무너지는 농촌공동체의 벼랑 끝에서 이룬 마지막 꽃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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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대단하였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화려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면 며느리 손자들이 무대로 뛰어올라가 부모님을 중심으로 춤을 추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눈물겨운 장면들이었다.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아들 딸 며느리들이 풀꽃으로 꽃다발을 만들어 바쳤다. 서로 헤어져 가난하고 눈물겹게 살던 부모 형제들이 한 덩어리가 되던 그 무대의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눈물이 난다.
그 후로 시골을 떠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한곳으로 뭉쳐지지 않았다. 이제 고향에 부모님이 살아 있는 가족이 드물어졌고, 사람 사는 생활도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2세들이 부모님의 고향을 꿈에도 목메어 그리워할 리 만무한 것이다. 콩쿠르가 끝나고 한때는 윷놀이 하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새벽까지 울리기도 했지만, 이제 고향은 우리에게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는 그 이상의 그 어떤 끈도 아니게 되어가고 있다.
크고 밝고 휘영청한 고향의 달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향의 동산에 떠 마을을 훤하게 비추지만 고스톱 칠 숫자도 없어 쩔쩔매고, 낮 동안 윷놀 사람이 모자라 윷놀이도 시들시들해졌다. 아! 고향. 생각만 해도 눈물이 솟았던 그리운 고향 산천, 고향을 향해 팽팽하게 당겨지던 끈은 느슨해져 가고 이제 고향은 우리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그려지는 추억과 향수로만 남았다.
둥근 달이 훤하게 뜬 밤, 선물을 들고 버스에서 내리던 동무들의 상기된 얼굴들, 그들과 어깨를 비비며 뒹굴던 추석, 그리고 그들이 또 떠나 가버린 고향의 텅 빈 달빛 아래 남아 외롭고 쓸쓸하게 강변을 헤매던 나는 지금도 고향의 달빛 아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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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소설가)
도시의 생활이 가장 지겨울 때는 언제인가. ‘먹고 살기 힘든데 그런 거 생각할 틈이 어디 있어’ 하고 되받을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세상살이 어디든 지겨운 일이야 늘 있게 마련이지요. 지금은 전업작가로 글만 쓰고 있지만, 저도 한때 10년간 직장생활을 했답니다. 그래서 언제가 가장 지겨운지도 잘 알고 즐거운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겨운 건 어느 계절에 특별히 그런 느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만날 그날이 그날 같다는 거지요. 눈에 표시가 나게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뒤로 가는 건 아닌데도 뭔가 한자리에 고여 있는 듯한 느낌요.
저는 도시를 표현할 때 ‘흙으로부터 차단된 감옥’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아무리 넓은 도시라 하더라도 자연히 맨땅의 흙으로부터 멀어지고, 또 말 그대로 흙으로부터 차단된 감옥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감옥 안에서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것처럼 그저 그 안에서 시간의 쳇바퀴만 돌리고 살다 어느 날 어느 집 정원에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포도라든가 이제 막 열매가 익어가는 감나무를 볼 때 비로소 가을이 우리 곁으로 오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럴 때 가장 생각나는 곳이 바로 고향 아니겠습니까. 지난 여름 주말이든 평일이든 가릴 것 없이 피서 차들이 고속도로를 메우고, 그래서 그 고속도로가 이 땅에서는 가장 속도가 느린 저속도로로 바뀔 때도 산과 바다를 찾아서는 떠났어도 왠지 고향 마당에는 또 들르기가 쉽지 않았던 거지요. 아마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온전하게 쉴 틈도 없는 나날들이었고, 또 때로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또 때로는 그럴 만한 경제사정조차 여의치 않아 고향에 내려가기 쉽지 않았던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고향 마당에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저도 자주 고향에 내려가지 못합니다. 늘 도시의 무엇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무엇이 내 발목을 잡습니다. 그러나 막상 고향에 내려갔을 때, 고향 마당에 도착해서야 드는 생각 중의 하나는 왜 좀 더 진작, 그리고 자주 이곳을 찾지 못할까 하는 것이지요.
[SET_IMAGE]8,original,right[/SET_IMAGE]한가위는 단지 그것이 명절이어서만 즐거운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바쁜 도시생활을 하다, 다만 며칠만이라도 우리가 전원 한가운데에 서서 가족과 함께 곡식이 익어가는 모습을 보고, 또 아이들과 함께 하늘이 높아져 가는 모습을 보고, 1년 365일 동안 거리의 가로등만 쳐다보다 정말 모처럼 밤하늘의 보름달을 바라볼 때,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휴식이 되고 또 삶의 위안과 평화를 얻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추석 때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꼭 하는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경건하게 차례를 지내는 일입니다. 내가 어디에서부터 와 이 자리에 있는지, 또 나를 있게 하기 위해 어떤 분들이 계셨는지, 또 그 분들의 산소는 어디인지, 집에서 차례를 지낸 다음 다시 산소를 찾아보는 일을 잊지 않습니다. 조상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또 마음이 저절로 겸손해지는 시간이기도 하답니다.
그리고 고향 마을 어른들을 찾아뵙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자랄 때 우리 모두를 다 내 자식같이 귀하게 여기셨던 어른들 아니던가요? 또 고향에 가면 어린 날의 친구들을 꼭 만나고 온답니다. 절반은 대처에 나가 살고, 또 절반은 고향 인근에 살고 있는 옛친구들도 이런 명절 때가 아니면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향에 내려가 한가위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오는 것만으로도 고향을 떠나 대처에 나와 살며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거나 놓치고 산 것들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거기에 도시에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연까지도 마음껏 바라보고 또 마음껏 취하고 오는 것이지요.
그것도 어떤 아쉬움 속에서가 아니라 한가위의 달만큼이나 크고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또 되돌아보고 오는 것이지요. 이 가을, 여러분 모두 부디 저만큼이나 풍성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고향 마당에서 느낀 가을볕처럼 다녀와서도 나날이 화사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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