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의 정신건강정책은 예방부터 회복까지 전 주기에 걸쳐 전 국민의 정신건강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023년 12월 5일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정신건강정책 비전선포대회’에서 발표된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에 이 같은 내용이 잘 담겨 있다. 정부의 정신건강정책은 그동안 중증 정신질환자를 중심으로 펼쳐졌지만 앞으로는 누구나 이용하는 일상적 마음돌봄 체계를 구축하는 것에 집중된다. 신체질환과 같은 수준으로 정신응급대응·치료체계가 재정비되고 일상회복을 위한 재활과 취업·주거지원 등 복지서비스가 제공된다.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개선도 함께 이뤄질 전망이다.
정부가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을 내놓은 이유는 지금이 정신건강정책에 대전환이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신체건강 지표는 선진국 중에서도 상위권이다. 2021년을 기준으로 기대수명은 83.6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80.3년보다 길고 10만 명당 영아사망률도 2.4명으로 OECD 평균 4.0명보다 훨씬 낮다. 그러나 정신건강 지표는 매우 좋지 않다.
2022년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5.2명으로 OECD 국가 중 1위다. 삶의 만족도는 38개국 중 34위다. 정신질환으로 진료받은 사람은 해마다 늘고 있다. 특히 20대 우울증 환자 수는 2018년에 비해 2022년 약 두 배 늘어났다. 정신건강정책을 강화하고 투자를 늘려야 할 시점이다. 윤 대통령은 12월 5일 비전선포대회에서 “국민의 정신건강은 ‘사회안보’에 해당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한 바 있다.
정부는 크게 네 가지 전략을 통해 정신건강정책의 대전환을 이뤄내겠다는 계획이다. 일상적인 마음돌봄 체계를 만드는 것이 그중 하나다.

2년에 한 번 국가 정신건강검진 강화
먼저 2027년까지 국민 100만 명에게 전문 심리상담을 지원한다. 중증 정신질환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정서·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이들의 마음 문제가 중증 질환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조기에 개입하고 사전 예방한다는 차원에서다. 2024년 정신건강 중·고위험군 8만 명에게 전문 심리상담을 제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상자를 늘려나간다. 영국의 ‘근거기반 전문 심리상담 서비스(IAPT)’를 본뜬 것으로 IAPT 서비스를 받은 우울증 및 불안장애 환자의 50%가 완쾌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현재까지 20~70세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 정신건강검진은 10년을 주기로 이뤄졌다. 앞으로는 검진주기를 2년으로 단축하고 검사질환도 우울증 하나에서 조현병, 조울증 등으로 넓히는 방안을 추진한다. 우선은 20~34세 청년층을 대상으로 적용할 예정이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을 소개하는 12월 5일 브리핑에서 청년층을 대상으로 검진주기를 우선 단축하는 이유에 대해 “조울증·조현병 등 주요 정신질환이 20~30대에 주로 발병한다는 것과 조기 발견 시 상담과 약물치료 등으로 적절한 치료와 회복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라며 “단계별로 확대 시행하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의 마음건강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고 지원하는 방안도 다각도로 추진된다. 정서·불안부터 학교적응 문제까지 마음건강 문제를 점검할 수 있는 ‘위기학생 선별 검사 도구’를 개발하고 기존의 ‘학생 정서·행동특성검사’도 개편한다. 소외된 위기학생을 위해서는 청소년 밀집지역으로 찾아가는 ‘청소년 마음건강 지킴이 버스’를 확대하고 위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생활밀착형 상담사’를 늘린다.
직장인 마음건강 지원체계도 강화한다. 중대산업재해 경험자나 감정노동자 등 정신건강 취약 근로자를 위한 직업트라우마센터를 14곳에서 23곳으로 확대 개설한다.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도 강화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근로자건강센터나 직업트라우마센터 등을 통해 상담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300인 미만 사업장에는 온·오프라인 상담 확대 방안을 마련한다. 실직자나 구직자에 대해서도 전국 74곳의 고용센터를 통해 심리상담을 제공하는 등 마음건강 지원을 이어나간다.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의 또 다른 전략은 정신응급·치료체계를 재정비하는 것이다. 정신응급 대응체계는 신체질환 치료 여건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다른 진료과에 비해 시설 등 인프라가 모자랄뿐더러 인력기준이나 치료 보상수준도 미흡하다. 이에 정부는 정신응급 현장 대응체계를 새롭게 구축할 예정이다.
24시간 전국 어디에서든 정신응급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17개 시·도별 정신건강전문요원·경찰 합동대응센터를 설치한다. 센터에서는 정신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정신건강전문요원과 경찰이 함께 출동해 정신과적 위험을 평가하고 응급입원에 대한 동의를 받고 이송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사법입원제’ 사회적 논의 시작
외상 등이 있는 정신질환자에 대해 상시 대응할 수 있는 인프라도 넓힌다. 권역정신응급의료센터를 2025년 전국으로 확대해 운영하고 운영기관에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응급입원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게 정신응급병상을 2023년 139병상에서 시·군·구당 최소 1병상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정신건강 의료서비스의 질도 높여 신체질환과 대등한 수준의 의료 질을 확보한다. 폐쇄병동 집중관리료와 격리보호료 등을 두 배로 인상하고 중증 정신질환자 수가를 개선하는 등 보상을 늘리는 방안이다.
정신질환자 입원을 가족이 아닌 법원이 결정하는 ‘사법입원제’를 도입하는 것과 관련해 사회적 논의도 시작한다. 사법입원제가 도입될 경우 환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도록 환자 대면 진술권을 보장하고 절차 조력을 의무화하는 방안 등도 마련될 예정이다.
자해·타해 위험이 있는 정신질환자가 임의로 치료를 중단하지 않게 ‘외래치료지원제’도 활성화한다. 외래치료지원제는 시·군·구청장이 정신질환자의 외래치료지원을 결정하고 환자가 따르지 않으면 정신의료기관 평가를 거쳐 입원하도록 하는 것이다. 법적 근거는 있지만 강제입원 환자에게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등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정부는 정신질환자 정보 연계를 강화하고 치료지원제를 활용하는 의료기관에 보상을 주는 등의 방안을 추진한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차별과 인식개선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은 정신질환자가 경제적·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지원을 확대하는 것에도 초점을 맞춘다. 취업성공패키지에 참여한 정신장애인을 대상으로 심리안정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사회적기업 육성법상 취약계층에 중증 정신질환자를 포함한다. 정신장애 특성을 고려한 공공일자리를 지원하고 정신장애인에 적합한 직무모델을 지속적으로 개발해나간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복지도 확충한다. 정신요양시설의 수준을 개선하되 장기적으로는 정신재활시설로 개편하도록 한다. 상대적으로 엄격한 노인시설 수준으로 열악한 시설을 개선하는 것이다. 정신재활시설은 시·군·구당 최소 1곳 설치하는 것을 검토한다. 현재 재활시설은 전국에 351곳이 운영 중이지만 102개 시·군·구에는 설치돼 있지 않다. 정부는 정원기준을 개선해 시설 이용자를 현행 대비 1.5배까지 확대할 방침이다. 조 장관은 “전국 어디에서나 복지재활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정신재활시설 최소 설치 기준을 마련하고 국제적인 수준의 복지서비스를 개발하겠다”고 말했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고 본인의 의사가 최대한 반영되도록 지원하는 등 정신질환자의 권리보호를 강화한다. 정신질환자가 정신건강 문제로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되는 경우에 대비해 치료와 관련해 자신의 의사를 미리 표현해두는 ‘정신건강사전의향지시서(PAD)’ 도입을 검토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행 중인 이 제도는 유사시에 대비해 희망하는 의료기관이나 복용을 거부하는 약물 등을 미리 작성해두는 제도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보험가입 장벽을 완화하고 이들을 위한 보험상품을 개발하는 방안을 연구한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정신질환자의 자격취득이나 취업을 원천 제한하는 규제도 완화해나갈 방침이다.
자살예방교육 의무화
이처럼 정신질환자에 대한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전 국민적인 인식의 변화도 필요하다. 국립정신건강센터의 2021년 조사를 보면 ‘정신질환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응답자의 59.6%에 달했다. 정부는 마음건강 문제는 해결할 수 있고 주변의 도움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나갈 계획이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언론보도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언론보도 권고기준’ 등을 마련하고 정신질환에서 회복한 당사자를 홍보대사로 위촉해 경험을 공유하는 프로그램도 만든다.
자살예방교육은 의무화할 예정이다. 약 9만 개 기관, 1600만 명을 대상으로 2024년 7월부터 자살예방교육을 실시한다. 학생과 직장인 등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는 자살예방 인식개선 교육을, 사회복지시설 종사자 등 서비스 제공자를 대상으로는 생명지킴이 교육을 실시한다.
이 같은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을 원활히 수행하고 정신건강정책 추진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대통령 직속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도 신설한다. 위원회에서는 정신질환자의 사회복귀 로드맵 등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과제를 논의하고 세부 추진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윤 대통령은 2023년 12월 5일 비전선포대회에서 “정신건강 문제는 개인이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국가 어젠다로 삼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며 “정부는 예방, 치료, 회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지원체계를 재설계해서 정신건강정책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바꿔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은 회사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지역사회에서도 쉽게 전문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일상적인 마음돌봄 체계를 구축하겠다”며 “적기에 질 좋은 치료를 받고 중단 없이 치료·관리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정신건강정책의 틀을 완성해서 국민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김효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