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입으면 안 춥니?’, ‘네가 살 뺄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 ‘공부만 할 때가 좋은 줄 알아’.
어린 시절, 어른에게 자주 들었던 이야기를 꼽아보라면 이 세 가지가 아닐까 싶다. 성인 이십 년 차로서 이 말들을 곱씹어 보니 앞선 두 가지에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지만 세 번째는 좀처럼 동의하기가 어렵다. 가고 싶은 데도 맘껏 가지 못하고 사고 싶은 물건도 사지 못하며 엄마가 잠든 틈에 어두운 부엌으로 잠입해 김치찌개 속에 든 돼지고기를 몰래 건져 먹으며 식탐을 달래야 하는 아이의 삶이 무어 그리 좋단 말인가. 나더러 아이와 어른의 삶 중 하나만 택해 평생을 살라고 한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하겠다.
물론 아이의 삶이 부러운 경우도 있다. 제 기분을 마음껏 드러내도 “사춘기라서 그래”라는 한마디로 용납이 된다는 점이다. 나 역시 아이처럼 기분 따라 행동하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낀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사십춘기’라는 민망한 단어의 주인공이 되기 십상이므로 마음속에서 폭풍우가 일어나더라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편이 신상에 이롭다. 복잡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다 못해 꼬여버린 며칠 전에도 울 것 같은 기분을 애써 잠재우며 몸을 움직였다. 다음 날 해내야만 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묵은 빨래를 돌리고 베개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고 물때 낀 화장실을 청소하다가 아무도 몰래 변기 속에 한숨을 뱉고 물을 내렸다.
내 기분이 그러거나 말거나 날은 밝아왔다. 가슴속에 각자의 고충을 숨긴 어른들이 만나 웃는 얼굴로 일한 후 점심을 먹었다. 일, 육아, 운동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화제는 자연히 시간 관리로 이어졌다. 나는 회사를 운영하며 육아에 집안일까지 모두 감당해 내는 상대방에게 그 비법을 물었는데 “아무리 바빠도 뜨개질을 한다”는 의외의 해답이 돌아왔다. “뜨개질은 조금씩 하다 보면 어느새 완성이 되고, 하다가 잘못 뜨면 풀고 다시 하면 되거든요. 이게 일상에도 적용이 돼요. 해야 할 일이 아무리 많아도 조금씩 하다 보면 해낼 수 있고 그러다가 꼬이더라도 풀고 다시 하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일상이 나를 덮쳐도 무섭지가 않더라고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자꾸만 맴돌았다. 그래, 복잡하게 꼬여버린 생각은 풀어내면 그만이지 울기는 왜 울어? 아무래도 풀어지지 않으면 그까짓 거 잘라내면 그만이다, 뭐!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마트에 들러 맥주를 샀다. 간밤의 질풍노도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나를 위해 축배를 들기 위함이었다. 냉동실에서 잠자고 있던 삼겹살을 잔뜩 넣어 김치찌개를 가장한 고기 찌개도 바글바글 끓였다. 찌개 국물을 안주 삼아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삼키니 “캬아!”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 한가운데를 꽉 막고 있던 돌덩이가 데구루루 굴러 내려갔다. 아이들은 꿈도 못 꿀, 어른의 맛이다.
이주윤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어쩌다 보니 맞춤법을 주제로 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국어사전 속에서 온종일 헤매는 일이 싫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체질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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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