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은 ‘가왕’이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실제로 ‘친구여’,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부지기수의 히트곡, 탁월한 가창력, 식지 않는 인기, 후대에의 막강한 영향력을 전제하면 우리 음악가 가운데 그의 위로 놓을 자는 없다. 80년 대중음악 역사상 한국의 대중가수 가운데 1위는 말할 것도 없이 조용필이다. 1이라는 숫자는 조용필을 위해 남겨둬야 할 영구결번이다.
왜 가왕인가. 먼저 그때까지 한국에 존재하고 있던 모든 음악스타일을 통합한 인물이라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로커 출신답게 ‘못 찾겠다 꾀꼬리’, ‘여행을 떠나요’는 록이고, ‘창밖의 여자’, ‘그 겨울의 찻집’은 서구형 발라드, ‘일편단심 민들레야’와 ‘허공’은 트로트이며 ‘친구여’ 같은 곡은 포크의 숨결이 흐른다.
‘한오백년’, ‘강원도 아리랑’과 같은 민요도 했고 소울, 재즈, 컨트리풍의 노래도 있고 심지어 ‘선구자’와 같은 가곡도 불렀다. 하지만 장르를 모두 시도했다는 의미보다 한 곡에 여러 장르의 스타일이 융합되어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점에서 ‘장르의 위대한 통합’ 또는 ‘한국 대중음악의 용광로’라는 찬사가 주어지는 것이다. 누군가는 “한국에는 조용필이라는 장르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든 음악을 포괄하고 섞어서 자신의 독자적 스타일을 확립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 질문을 조용필에게 던졌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한 번도 당대에 사랑받는 음악을 놓친 적이 없다.
젊은이들의 감각과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시대의 음악, 앞서가는 음악을 알기 위해 오래도록 AFKN을 청취해왔으며 지금도 젊은 밴드와 가수의 음반을 듣는다!”
그는 ‘가수는, 음악가는 무엇보다 음악을 부지런히 듣고 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한 가지 스타일에 고정되어서는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없다. 우리는 그를 통해 음악가의 시작과 끝이 음악듣기임을 다시금 깨친다. 또한 그가 누구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노래를 잘했지만 그에 앞서서 노래를 잘하기 위해 무진 노력을 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는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오랜 무명의 시련기를 벗고 비상했다. 스타덤도 잠시, 얼마 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그만 활동정지를 당했다.
하지만 그는 여느 가수처럼 세상을 한탄하거나 비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 기간에 노래 소리를 바꾸는 자기혁신을 단행한다.
가창력을 연마하고 울림을 얻기 위해 판소리와 민요를 배우는 고행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1980년, 이전과는 다른 굉음의 ‘창밖의 여자’로 컴백해 더 큰 존재로 포효했다. 조용필은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엄청난 열정과 욕심을 지닌 인물이다.
갈수록 그의 전설은 확고해지고 있다. 지난해 소록도 위문공연 때는 ‘작년에 한 다시 온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밴드와 함께 다시 공연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를 잘 모르는 새로운 세대들도 ‘나가수’를 비롯한 오디션 프로를 통해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와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같은 조용필의 노래와 친숙해지고 있다. 모든 행사기획, 방송프로, 공연의 관계자들이 품는 꿈이 조용필의 무대를 꾸려보는 것이다.
“가수의 기본은 무대에 서는 것이다. 스케줄이 빠듯해지면 음악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진다. 가수가 있어야 할 곳은 콘서트 무대다. 무대에 서야 큰 가수로 커나갈 수 있다!” 조용필은 무대에서 계속 노래하는 게 가수의 기본임을 일깨운다. 기본의 숭배와 열정, 이것이 조용필의 성공 동력이다.
글·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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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