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에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제도가 있었다. 시험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립문에 들어서는데, 우물터에서 어머니가 기도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용왕님! 제발 우리 딸아이가 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게 하여 주십시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숨소리를 죽이고 들어보아도 “제발 불합격하도록 도와주십시오. 합격하여도 입학금이 없어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차마, 어미의 입으로 말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그 이듬해 오월이었나 보다. 수업시간에 창문 밖을 내다보니 라일락 나무 아래, 연보랏빛 한복을 입은 어머니가 서서 두리번거리고 계셨다. 그때 어머니가 건네주던 노르스름한 편지 봉투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때는 철이 없어서였겠지. 봉투 안에 든 돈을 행정실로 가져가는 발걸음이 어찌 그리도 가벼웠는지. 그리고 남은 잔돈으로 친구들과 교내 매점에서 사먹은 도넛은 또 어찌 그리도 맛있었는지.
하교 후, 집으로 돌아와 바느질하는 어머니의 왼손을 보았는데 결혼반지를 빼낸 손가락에 하얀 자국이 선명했다. 그제야 나는 월사금이 많이 밀리던 즈음에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짧아지던 생각이 났다. (그 시절엔 가발사업이 수출품목 중 꽤 큰 비중을 차지하던 때라, 머리카락을 사러 마을로 돌아다니는 상인이 있었다.) 그 돈으로 나는 간신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바라던 대로 훌륭한 사람도 되지 못했고 부자도 되지 못했다.
또 이런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멀리 돈 벌러 가셨다는 아버지는 종종 소식이 끊겼고, 어머니가 밤새워 한복 바느질을 해서 생활했다. 우리 집은 늘 쌀을 조금 넣고 나물밥을 지어먹곤 하였는데 어머니는 쌀이 많은 쪽을 골라 도시락을 싸주시곤 하였다.
그 귀하디 귀한 도시락을 나보다 더 가난한 친구의 옥수수죽과 바꿔먹고 돌아오면 “잘했다. 반장이면 어려운 친구를 보살필 줄 알아야 한다”라며 칭찬하셨다.
지금은 우리나라 개인소득이 2만달러가 넘고 다른 나라를 도우며 살고 있지만, 그 당시는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던 때라 끼니 때만 되면 깡통을 들고 찾아오는 전쟁난민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싫은 기색 없이 따뜻한 나물밥을 한 주걱씩 나눠주는 것을 보면서 우리 형제들은 자랐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나는 어떤 선생님보다 어머니가 먼저 생각난다. 부모는 인생을 가르치는 스승이고 가정은 사랑을 가르치는 교실이다. 교실과 스승은 불가분의 관계인데, 요즘 내가 일하는 산골 초등학교만 보아도 도시에 사는 부모가 이혼하고 시골 할머니집에 맡긴 어린이들이 상당수 있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가치관도 많이 달라졌지만, 가정의 소중함은 영원히 변해선 안 되는 것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건 과학보다 예술보다 사랑이다. 사랑은 가정이라는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 시절 어느 어머니가 그리하시지 않았을까마는 자식을 먹이느라 자신은 늘 배고팠을 나의 어머니, 자식들 주려고 아껴두었다가 상한 음식을 물에 씻어드시던 어머니, 말년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오월이 오면 약 한 첩 지어드리지 못했던 것이 못내 가슴 아프고 어머님 연보랏빛 한복이 생각난다. 사람이 죽어서 꽃이 될 수 있다면 아마, 어머니는 라일락꽃이 되었을 것 같다.
글·유금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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