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말일은 제법 포근했다. 이제는 봄인가 싶었더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3.1절 연휴의 꽃샘추위라니…. 고향 근처 노인병원에 갈 일이 있었다. 예전에는 울창한 숲이었는데, 그 산자락이 잘려 나간 자리에 호텔급 병원이 들어섰다.
만나야 할 사람은 늦는 모양이었다. 하릴없이 병원 뜰에서 서성거린다. 병원 뒤쪽 숲길로 들어가는 젊은 커플이 눈에 들어온다. 바람이 아직 쌀쌀하건만 그들은 춥지 않아 보인다. 정현종 시인의 ‘좋은 풍경’이 그들을 뒤따랐다.
“늦겨울 눈 오는 날 /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
밤나무에 기대어 그 짓을 하는 바람에 /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는 ‘좋은 풍경’이다. 청춘의 사랑의 열기가 밤꽃을 서둘러 피웠다는 상상이 참으로 근사하지 않은가.
요즘에는 청춘 남녀가 나무에 기대어 ‘그 짓’을 하지 않더라도 꽃이 일찍 핀다. 최근 30년 사이에 개나리·진달래·벚꽃 등 봄꽃의 개화일이 1주일 정도 빨라졌다고 한다.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꽃이 일찍 피면 일찍 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여겼는데,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생물학자 최재천 선생을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 엇박자’ 현상은 꽤 문제적이다.
가령 기온 상승으로 인해 예전보다 새잎이 일찍 돋으면 그걸 갉아먹으려는 애벌레도 일찍 등장한다. 그런데 그 애벌레를 먹고 자라는 철새는 예전의 시간에 맞추어 날아온다. 비슷한 시간에 돌아와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는다.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올 즈음이면 벌써 상당수의 애벌레는 사라지고 없다. 그러니 철새새끼의 일용할 양식이 부족해진다.
그래서 네덜란드 생태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알락솔딱새가 지역에 따라 최고 90퍼센트까지 감소했다고 한다.
덴마크 제비들은 음양의 엇박자 때문에 문제라고 한다. 수컷들은 점점 일찍 돌아오는데 암컷들은 여전히 느긋하게 돌아오기 때문에 일찍 날아온 수컷들의 애환이 크다는 것이다.
생태의 엇박자는 비단 애벌레나 철새, 꿀벌들만의 문제일 수는 없는 법이다. 우화적인 소설 <삽의 이력>(서유미)에서 사회적 엇박자는 매우 가혹하다. 동쪽 사무실에서의 반복되는 일상 업무에 권태를 느낀 김은 서쪽의 현장 근무로 파견된다. ‘미래 도시의 건설’이라는 역설적 슬로건이 붙어 있는 거기서 그의 임무는 주간에 구덩이를 파는 일이다.
그런데 이튿날 출근해보면 전날 파놓은 구덩이가 고스란히 메워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간 작업자인 윤의 임무가 구덩이를 메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김은 파고, 윤은 메우는 일이 반복된다. 부조리한 상황 때문에 그들은 사무실에 연락을 취하지만 언제나 불통일 따름이다. 도대체 이를 어쩔 것인가?
아무래도 담당자는 더 늦어질 모양이다. 내가 너무 서둘러 온 것인지도 모른다. 덴마크 제비처럼 엇박자 형상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2인3각 경기의 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젊은 연인들의 걸음에서는 경쾌한 봄 리듬이 넘쳐난다. 저 숲 속 어딘가에서 곧 ‘좋은 풍경’이 묘출될지도 모르겠다.
글·우찬제 (서강대 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