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일상 입고 다니는 옷도 빛깔을 맞추어 입고, 자신의 체형과 품위에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으려고 마음을 쓴다.
어울려야 아름답게 보인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반대로 잘 차려 입은 멀쩡한 신사나 숙녀가 거칠게 말하거나 야비하게 행동하면,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 품격이 어울리지 않음을 비천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니 아름다움은 어울림에서 나오고, 어울리지 않으면 추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이야 아름답거나 황량하거나 그대로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인간세상은 어울림(화합)과 어울리지 않음(불화)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대로 볼 수 있을 듯싶다. 문제는 인간은 누구나 어울림을 바라지만, 현실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 저질러진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선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악이 저질러진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어떻게 하면 선하게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서로 어울릴 수 있는지를 알려주려고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어울림은 하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연을 보호한다며 인간의 모든 발자국을 거부하는 일은 자연과 인간의 어울림이 아니다. 중국 당(唐)나라의 유우석(劉禹錫)이 “산은 높아서가 아니라 신선이 있어야 이름난다”고 말한 것처럼, 자연과 인간이 어울릴 때 오히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이순신의 자취가 없었다면 한산도는 이름 없는 섬이었을 것이다. 자연도 인간과 어울려야 그 아름다움과 의미가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사람의 어울림이야 작게는 나와 너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크게는 나와 세상 모든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이 어울리고, 남편과 아내가 어울리면 한 집안이 화목하고, 한 조직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어울리고 동료 사이에 서로 어울리면 조직 전체가 화합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욕구를 지닌 한 개인이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사회에는 극단적 개인주의나 경쟁의식의 뿌리가 깊으니, 어떻게 서로 어울릴 수 있다는 말인가?
공자는 인격의 근본 덕성인 ‘인’(仁)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자기 욕심을 이겨내고 예법을 회복할 것”을 가르쳤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어울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만 위하는 욕심, 자기만 내세우는 주장을 적절히 통제해 서로 사랑하는 마음, 서로 공경하는 예절이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남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남에게 사양할 수 있고, 남을 사랑할 수 있으며, 남과 어울릴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자신의 이념과 주장을 내세워 날 선 말투로 상대편을 비난하는 행동을 자주 만나게 된다. 남을 공경할 줄 모르고, 남과 어울릴 줄도 모르며, 오직 자신의 주장만 관철하겠다는 독선의 추악한 모습을 보면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얼마 전 경주에 가서 고적을 찾아다니다 몇 차례 길을 잃었는데, 길을 묻자 버스 정류장까지 자기 차로 태워다주는 사람, 멀리까지 데려다주고 되돌아가는 사람을 잇달아 만났다. 그 친절에 감사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을 발견하고 우리 사회의 희망을 느낄 수 있어 한없이 기뻤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글·금장태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