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음식은 좋은 식단의 상징이자 한식 상차림의 기본 철학이다. 우리 선조들은 시식(時食)이라고 해서 계절마다 제철에 나는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시절을 즐기고 건강을 돌보았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시식으로는 역시 나물이 으뜸이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움트는 새싹은 생명의 표상이다.
옛사람들도 봄나물을 귀하게 여겼던지 <태조실록>에 봄에 “새로 나온 나물과 홍귤, 사냥해서 잡은 것들을 종묘에 천신(薦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실에서는 사계절의 시작인 봄에 나는 나물을 조상에게 먼저 바쳤다. 그뿐 아니라 입춘이 되면 아직 채 녹지 않은 눈 밑에서 캔 움파·산갓·당귀싹 등 햇나물을 오신반(五辛盤)이라 하여 수라상에 올렸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이 저술한 세시풍속지 <경도잡지>나 그 이후의 <동국세시기>에는 이런 나물들이 양근·지평·포천·가평 등 경기도의 산골마을에서 진상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본받아 민간에서도 그 무렵이면 다섯 가지 나물을 갖춰 먹고, 쟁반에 담아 이웃에도 나누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초기 문신 서거정은 <사가시집>에 남긴 ‘입춘’이라는 시에라는 구절을 남겼다. 당시에도 오신반을 흔히 먹었음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나물은 자고로 “나물 먹고 물 마시고(飯疏食飮水) / 팔을 베고 누웠으니(曲肱而枕之) /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樂亦在其中矣)”는 <논어>의 구절처럼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빈곤의 상징이기도 했다. 얼마나 먹을 것이 귀했으면 산과 들에 나는 나물을 그렇게 상식했겠는가 말이다. 개화기 때 내한했던 선교사 제임스 게일은 “먹을 수 있는 나물의 가짓수를 한국 사람만큼 많이 알고 있는 민족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서양에서는 독초로 분류되어 가축에게도 안 먹이는 고사리를 물에 우려 독을 빼가면서까지 먹는 한국인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임금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 <일성록>에는 흉년이 들었을 때 정조가 “기민(飢民)들이 대부분 푸성귀를 먹고 연명해나가고 있어 봄나물이 나온 뒤에는 소금과 장(醬)이 더욱 긴요하니, 특별히 신칙하여 넉넉히 나누어주어서 일정한 기간 동안 먹고 살아갈 양식에 도움이 되게 하라”고 지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물이 구황의 역할까지도 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산골에서 성장한 이들에게 나물은 봄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강원도 양구가 고향인 이해인 수녀는 봄이 오면 “함께 산나물을 캐러 다니던 / 동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 친하면서도 가끔은 꽃샘바람 같은 / 질투의 눈길을 보내오던 / 소녀 시절의 친구들도 보고 싶다.”고 노래했다.
나물이 지금은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냉이·쑥·씀바귀·취나물·도라지·두릅·더덕·돌미나리·달래·부추 등의 봄나물에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다량 함유돼 있어 봄이면 찾아오는 춘곤증을 물리치고 원기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서울 인사동의 채식 뷔페 ‘한과채’에 가면 봄나물을 골고루 맛볼 수 있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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