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를 건국한 혁명세력은 서울로 천도하면서 서울성곽의 동서남북에 사람이 드나드는 사대문을 설치했다. 그 대문에 인(興仁)·의(敦義)·예(崇禮)·지(弘智)라는 네 가지 덕목으로 이름을 지어 현판을 크게 내걸었다. 이것만 봐도 조선왕조가 추구했던 이상이 ‘도덕국가’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저 위로 지도층부터 아래로 어린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도덕적 붕괴가 심한 현실을 돌아보면 조선사회의 이상이 얼마나 격조 높은 것인지 새삼 되새겨보게 된다.
그런데 조선왕조는 서울을 설계하면서 도시의 중심에 종루(鐘樓)를 세우고, 종을 쳐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하는 시각과 해제하는 시각을 알렸다. 서울의 중심에 자리 잡은 종루인 ‘보신각(普信閣)’의 ‘신(信)’은 사대문에 배당한 네 가지 덕목과 합해 다섯가지 인간의 기본 덕목[五常]을 이룬다. 사대문으로 통하는 큰 길이 종로통의 보신각으로 모이는 것처럼, ‘믿음[信]이라는 덕목은 다른 네 덕목을 연결하는 중심 덕목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공자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자는 “사람으로서 믿음이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큰 수레의 끌채 끝에 가로대가 없고, 작은 수레의 끌채 끝에 멍에가 없다면 그 수레가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수레와 소·말을 멍에로 단단히 묶지 않으면 수레가 갈 수 없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으로 결속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자는 나라를 다스릴 때 식량(경제)·군사(국방)와 더불어 ‘백성의 믿음’을 기본 과제로 제시했다. 군사나 식량이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나라는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는 존립할 수 없다. 공자는 이처럼 ‘백성의 믿음’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믿음이 있으면 기다릴 수도 있고, 고통을 견딜 수도 있다. 어떤 행위를 좋은 의도로 이해할 수도 있고, 부득이한 사정을 헤아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을 잃으면 기다릴 수도 없고 참을 수도 없다. 좋은 의도로 충고해도 비난하는 것으로 들릴 것이다. 사소한 부탁도 괴롭히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믿음의 결속이 풀어지면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사이도 의심과 경계심으로 틈이 벌어질 것이다. 하물며 낯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야 오죽하겠는가.
우리 사회에 믿음이 사라지고 ‘불신’ 풍조가 전염병처럼 번진 것이 걱정스럽다. 전화를 받으면서도 사기전화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부모는 어린 자녀들에게 낯선 사람이 친절하게 접근하면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식품을 믿을 수 없고, 사람을 믿을 수 없고, 법을 믿을 수 없고, 정치를 믿을 수 없을 만큼 불신이 만연한 것이 현실이다. 바로 그런 곳이 지옥일 것이다. 서로 믿고 살수 있는 신뢰의 사회가 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말이다.
믿음을 뜻하는 ‘신(信)’이라는 글자는 ‘사람의 말’이다. 한마디의 말이 실제와 일치하면 믿음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믿음을 회복하는 방법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기풍을 일으키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공자는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을 돌아보라”고 가르쳤다. 또 “옛사람이 말을 함부로 내놓지 않는 것은 자기의 행실이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던 것”이라고 일깨웠다.
정치지도자부터 자기가 한 말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존중받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믿음을 배양하고 확산하는 소중한 방법이다.
글·금장태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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