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벌교 사람들은 “감기 석 달에 입맛이 소태 같아도 꼬막 맛은 변치 않는다”고 했다. 남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던 그 꼬막에 전국적인 지명도를 안겨준 것은 지역 출신 소설가 조정래의 역작 <태백산맥>이다. 요즈음 벌교를 찾는 사람들은 으레 꼬막을 찾고,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읍내의 꼬막식당들은 성업을 이루고 있다. 오죽하면 “태백산맥이 벌교를 먹여 살린다”는 우스갯소리가 다 나왔겠는가.
작가는 꼬막에 대한 애정을 소설 곳곳에서 내비친다. “간간하고, 졸깃졸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도 한 그 맛”이라는 구절은 이제 꼬막 맛을 묘사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문장이 되었다. 그는 외서댁을 겁탈한 염상구의 입을 빌려 “쫄깃쫄깃헌 것이 꼭 겨울 꼬막 맛이시”라는 다분히 외설적인 비유도 마다하지 않았다.
꼬막은 유사종도 많고 별칭도 다양하다. 참꼬막과 새꼬막, 그리고 표준명이 피조개인 피꼬막과 큰이랑피조개는 얼핏 보면 외관이 흡사하게 생겼다.
그 구분은 크기와 껍데기에 패인 부챗살 모양의 방사륵 숫자로 가능한데 몸집은 피조개가 제일 크고 참꼬막이 제일 작다. 방사륵도 참꼬막은 17∼18줄인데 비해 새꼬막은 32~33줄, 피조개류는 40줄 안팎이다.
1803년에 김려가 저술한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는 골이 깊고 뚜렷한 참꼬막의 방사륵을 기왓골에 빗대 그 이름을 와롱자(瓦壟子)라 했고 강요주(江瑤柱)라는 명칭으로도 기록하고 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꼬막을 감( )이라 하고 “크기는 밤만 하며 껍질은 조개를 닮아 둥글다. 빛깔은 하얗고 무늬가 세로로 열을 지어 늘어서 있으며 줄과 줄 사이에는 도랑이 있어 기와지붕과 같다. 두 껍질의 들쑥날쑥한 면이 서로 엇갈려 맞추어져 있다. 고깃살은 노랗고 맛이 달다”고 했다.
그는 또 중국의 고서를 인용하여 괴륙(魁陸)·괴합(魁蛤)·와옥자(瓦屋子)·와롱자(瓦壟子)·복로(伏老)·공자자(空慈子) 등의 이름과 천련(天) 또는 밀정(密丁)이라는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다. 새꼬막에 대해서는 좀 엉뚱한 기술을 하고 있는데, 그 이름을 작감(雀)이라 하면서 “꼬막과 유사하나 기왓골 모양의 도랑 무늬가 더 가늘고 기름기가 있다. 흔히 말하기를 이것은 참새가 들어가서 변한 것이라 한다”고 했다.
꼬막류는 조개 종류 중 유일하게 혈액 속에 헤모글로빈을 가지고 있어 붉은 피가 흐른다.
참꼬막과 새꼬막에 비해 월등히 큰 피조개의 경우 피의 양이 많아 피조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참꼬막은 제사상에 올린다고 해서 ‘제사 꼬막’으로 불리며 새꼬막은 ‘똥꼬막’이라고도 불린다. 성장 기간도 참꼬막은 4년이 걸리지만 새꼬막은 2년이면 다 자라는데 이 때문에 참꼬막의 가격이 월등히 비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전라도의 토산물로 기록되어 있는 꼬막을 옛날에는 선물용으로도 썼던 모양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남구만의 <약천집>에는 병석에 있던 처남이자 당대의 석학인 박세당에게 꼬막을 보내면서 동봉한 서찰이 나온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두루 지낸 고위 벼슬아치가 답례품으로 쓸 정도면 꼬막이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꼬막은 벌교 앞바다 여자만(汝自灣)에서 나는 것을 제일로 친다. 그곳의 갯벌에는 모래나 황토가 섞이지 않아 꼬막이 서식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벌교에서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일식당과 꼬막마을이 다양한 꼬막 요리로 알려진 곳이고 서울에서는 인사동의 여자만이 유명하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