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모란이 지고 있다. 오월의 시간 재촉이 자심한 까닭이다.
그러고 보니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고 노래했던 영랑(본명 김윤식·1903~1950)을 거듭 반추하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영랑에게 모란은 생의 희망이고 기쁨이며 기다림의 대상이었다. 아니 모란은 그가 소망하는 삶과 거의 등가였다. 그러니 영랑에게 시간은 오로지 둘밖에 없었을 터이다. 모란이 핀 시간과 모란이 진 시간. 당연히 모란이 핀 시간은 보람의 시간이고, 모란이 진 시간은 설움에 잠긴 시간이었다.
모란에 대한 반응은 영랑 이전에도 많았다. 고려 때 경기체가 <한림별곡>을 보면 꽃을 다룬 연에서 “홍모란 백모란 정홍모란” 하며 모란을 맨 먼저 으뜸 되는 꽃으로 노래한다. <공방전>의 저자로 알려진 임춘은 군왕을 추억하는 매개물로 붉은 모란을 형상화한다. 한시 ‘양국준 집에 하사하신 붉은 모란’에서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준 꽃으로 붉은 모란을 전경화하고, 임금을 추억하기 위해 벼슬아치들이 다투어 모란을 가꾸고 있음을 그린다.
원산지인 중국에서 모란이 들어온 것은 신라 진평왕 때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 신라본기에 전해지는 당 태종이 덕만에게 보냈다는 모란꽃 그림 일화는 <선덕여왕> <대왕의 꿈> 등 여러 사극에서 흥미로운 문화 콘텐츠로 활용했다. 모란이 널리 퍼진 것은 고려시대였다. <삼국유사>와는 달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모란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고려 현종 때는 왕이 대궐 안에 모란을 직접 심고,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가 모란을 예찬하는 시회를 열어 군신 간에 화답했다고 한다.
화려한 색채와 풍성한 자태 때문에 모란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꽃으로 얘기된다. 설총이 <화왕계>에서 모란을 ‘꽃들의 왕’으로 묘사한 이래 모란은 오래도록 ‘화왕(花王)’으로 군림했다. 조선시대 이이순의 의인소설 <화왕전>에서도 그러하고, 김수장의 <해동가요>에서도 “모란은 화중왕이요 향일화(해바라기)는 충신이로다”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심지어 무속신화인 <창세가>에는 미륵과 석가가 모란꽃 피우기 시합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여기서 모란은 세상을 지배하는 통치권을 암시한다.
얼마 전 제자가 모란을 들고 찾아왔다. 나는 그가 문학의 길을 가기를 바랐지만, 그는 제 길을 찾아 떠났다. 아, 모란이라니!
중국 당대의 문장가 한퇴지가 아직 문명을 떨치기 전에 시골에서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중에는 조카도 한 명 있었는데 열심히 노력하긴 하지만 학문적 성취가 영 시원치 않았다. 하여 다른 선생에게 부탁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못해 한퇴지는 조카에게 유감을 표하며 도대체 어떤 재주가 있느냐고 묻는다.
이에 어린 조카는 공부는 뜻대로 되지 않지만 모란꽃만은 자기 마음대로 기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후 7일 동안 모란을 손질한 조카는 짐을 꾸려 제 길을 떠났다. 얼마 후 열네 송이 모란이 형형색색으로 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송이마다 꽃 속에 한 글자씩을 안고 있었다. “雲橫秦領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구름이 진령 높은 고개 가로 막으니 집이 그 어디 있는고, 눈이 남관을 싸고 있으니 말이 제대로 못 걷네).”
한퇴지 본인이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며 지은 시였던 것이다.
한퇴지가 시로 빚은 마음을, 조카는 모란에 새겼다. 그 조카의 후일담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뛰어난 정원사나 꽃 디자이너로 성공하지 않았을까. 인생에 왕도는 없다. 백 사람에게는 백 가지의 길이 있게 마련이다. 스스로 찾은 길에서 보람차게 살며 모란을 들고 찾아온 그 친구 덕분에, 올해는 모란이 떨어져도 결코 슬퍼하지 않으련다.
글·우찬제(문학비평가, 서강대 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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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