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의 생활화는 정보를 빛의 속도로 확산시키고 있다. 가히 정보의 홍수라 할 만큼 많은 자료들이 대량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그 중에는 정확한 정보도 있지만 사실을 왜곡하는 오류도 허다한데 음식과 관련된 정보도 잘못된 것들이 난무하고 있다.
감자탕의 역사와 이름의 유래에 관한 터무니없는 해설은 그중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감자탕에 관해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 중에 그 이름이 돼지 등뼈에 든 척수를 ‘감자’라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거나 돼지의 등뼈를 ‘감자뼈’라 하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또 감자탕의 기원이 삼국시대에 돼지 사육으로 유명했던 현재의 전라도 지역에서 유래되어 전국 각지로 전파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우선 돼지 등뼈의 척수나 등뼈를 감자라고 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반박이다. 돼지의 어느 부위도 감자라 부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근자에 와서 감자탕이 유행함에 따라 정육점들이 감자탕에 들어가는 돼지 등뼈를 ‘감자탕뼈’ 또는 ‘감자뼈’라 부른 것이 그런 식으로 와전됐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감자탕의 삼국시대 기원설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기본적으로 금했기에 돼지고기를 흔히 먹을 수가 없었고 공급도 원활치 않았다. <고려도경>의 “고려에 양과 돼지가 있기는 하나 왕공, 귀인이 아니면 먹을 수 없으니 백성들은 해품(海品)을 많이 먹고, 도살법 역시 서툴다”는 기록이 그런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태종실록>에 “명나라 황제가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사신들에 쇠고기나 양고기를 주라’고 했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이다. 심지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촌로들은 평생 돼지고기 한 점 구경하지 못하고 어쩌다 관청에서 베푸는 잔치에서나 맛을 본다는 언급이 나올 정도로 귀한 것이 돼지고기였다.
게다가 감자탕의 다른 재료인 감자는 조선 후기에야 이 땅에 도입됐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북저(北藷 :감자)는 일명 토감저(土甘藷)라 하는데 순조 24~25년(1824~1825)에 관북에서 처음 들어온 것”이라 했다.
이런 형편인데 감자탕을 삼국시대부터 먹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황당한 것은 그런 주장이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백과사전에도 버젓이 올라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 출간된 여러 요리책에도 감자탕은 고사하고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1960년대 들어서 정부가 기업형 양돈업을 진작시킬 때까지 우리나라에 돼지고기는 귀했고, 따라서 감자탕의 주재료가 되는 등뼈도 흔한 것이 아니었다.
따져 보면 감자탕은 그 이후에 대중화된 음식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돼지고기의 공급이 대폭 늘어나고 삼겹살구이가 유행하면서 인기가 없는 부산물인 등뼈가 싸게 공급되자, 역시 싼 식재료인 감자와 결합되어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어쨌거나 돼지 등뼈에 감자와 우거지 등을 넣고 얼큰하게 끓이는 감자탕은 가격이 저렴하고 영양도 풍부해 서민들의 보양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감자탕 대신 감자국이라는 이름을 고집하는 서울 응암동 감자국거리의 태조대림감자국과 용산역 앞 감자탕거리의 서북감자탕이 널리 알려진 집들이다. 젊은이들의 동네 압구정동에서는 신미식당이 푸짐한 감자탕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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