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유배의 땅이었다. 뱃길이 멀고 험난한 데다 날씨도 궂을 때가 많고 토양도 척박해서 조선시대에는 중죄인이 귀양을 가던 곳이었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과 의문사한 소현세자의 세 아들 등 왕족을 비롯해 송시열, 최익현, 박영효 등 수백 명에 달하는 인사들이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생활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던지 기묘사화로 귀양살이를 했던 김정(金淨)은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서 제주도는 기후가 변화무쌍하여 “의복을 조절하기 어렵고 병도 나기 쉽다”고 했다. 인조 때 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왕족 이건(李健)은 “죄인의 땅 제주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조밥이고, 가장 두려운 것은 뱀이며, 가장 슬픈 것은 파도 소리”라는 기록을 남겼을 정도이다.섬의 4분의 1 정도만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인 데다 토양이 논농사 짓기에 부적합해서 밭작물을 주로 경작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비가 많이 오고 가뭄과 태풍까지 어김없이 돌아가며 찾아오는 터라 농작물이 성할 날이 드물었다. 먹을 것이 얼마나 귀했던지 제주도 대정에서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부인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민어, 겨자, 어란, 김치 등 여러 가지 음식을 보내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래도 사면이 바다라 해산물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지만 그것도 쓸 만한 것은 진상되거나 벼슬아치들에게 제공되었기에 서민들에게는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은 해녀들의 몫이었는데 그들의 삶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숙종 때 유배당한 김춘택(金春澤)의 <잠녀설(潛女說)>에는 전복을 따다가 할당량을 못 채우면 관아에 붙들려가서 매를 맞기도 하고, 모자라는 양은 사서라도 바쳐야 하는 해녀들의 비참한 생활이 기록되어 있다. 영조 때 귀양살이를 한 조관빈(趙觀彬) 역시 탐관오리들에게 가혹하게 수탈당하는 해녀들의 삶의 현장을 목격하고는 전복을 자신의 밥상에 올리지 말라는 내용이 담긴 시를 <회헌집(悔軒集)>에 남기고 있다.
이렇게 궁핍했던 식량사정 때문에 제주도에는 산과 들과 바다에서 흔히 나는 식재료를 혼합해서 조리하는 소박한 음식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 쌀이 부족하니 잡곡을 섞거나 잡곡에 해조류나 채소를 넣어 밥을 짓기도 하고, 범벅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곡물에 어패류를 섞어 죽을 끓이기도 하고 어패류에 해초나 채소를 첨가해 국을 끓여 먹기도 했다.
깅이죽은 그러한 제주도의 요리문화를 엿볼 수 있는 독특한 음식이다. 깅이는 방게의 제주도 사투리로 지역에 따라서는 겡이라고도 한다.
깅이죽은 작은 방게를 절구에 짓찧은 다음 즙을 내서 쌀과 함께 서서히 저어가며 끓인다. 쌀이 귀하던 시절에는 보리나 좁쌀로도 해 먹던 음식이다. 어려운 생활을 하던 해녀들이 여름철 보양식으로 먹던 음식인데 관절염이나 신경통 등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6·25 때 제주도로 피난을 갔던 천재 화가 이중섭은 게를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런데 그 이유가 곤궁했던 그 시절에 하도 게를 많이 잡아서 깅이죽을 끓여 먹고 반찬을 만들어 먹은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깅이죽은 제주도에서도 요즘은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섭지코지의 ‘섭지해녀의 집’과 제주공항 인근의 ‘모메존 식당’이 알려진 집들이다.
서귀포에서는 남원읍의 ‘태흥2리어촌관리공동체음식점’에서 깅이죽을 맛볼 수 있다. 제주도가 너무 멀다면 요리 방법이 그리 복잡하지 않으므로 흔한 방게를 구해서 직접 만들어 먹으면 어떨까. 해녀들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201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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