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8월 말, 홀로 산사(山寺)를 찾았다. 팔만대장경을 모신 법보사찰, 합천 해인사다. 해인사는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가야산(1,430미터) 남쪽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명찰이다. 언제가도 좋지만 여름엔 가야산에서 발원해 가람을 감싸고 흐르는 홍류동(紅流洞) 계곡이 그만이다. 특히 계곡옆으로 조성된 ‘해인사 소리길’ 6킬로미터 구간은 홍류동을 감상할 수 있는 진수다.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내려 지하철로 성당못역으로 이동한 뒤, 서부버스터미널에서 해인사행 버스를 탔다. 도보여행 길을 찾아갈 때는 대중교통이 좋다. 대개 길은 시작과 끝이 있기 때문에 자가용으로 이동하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또 해인사 소리길은 기차와 버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자가용보다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일부러 해거름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한낮 더위를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해질녘 운치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대구에서 출발한 버스는 5시 30분경 해인사주차장에 당도했다. 소리길이 목적이지만, 해인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터. 카메라를 둘러메고 경내를 잠깐 둘러봤다. 주말인데도 경내는 번잡하지 않고 조용한 편이었다. 여행객들은 대부분 홍류동 계곡 아래 캠핑장에 있었다.
해인사는 신라시대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대승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바다에 비유하며, 중생의 번뇌 망상이 멈출 때 비로소 우주의 참된 모습이 물에 비친다고 했다. 그래서 ‘물(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뜻한다.
해인사 경내에는 지난 2002년에 문을 연 성보박물관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과 판전을 비롯해 불교 관련 유물을 관리하고 알리기 위한 곳이다. 1층 전시실에는 가람의 역사가 잘 정리된 해인 역사실과 불교조각실, 공예실 등 체험 공간이 있다. 2층엔 현대미술과 불교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고(故) 백남준 선생의 팔만대장경 비디오아트가 설치돼 있다. 아이들과 함께 하기 좋은 곳이다.
뜨거운 여름과 붉은 가을을 잇는 소리
소리길은 박물관 바로 아래서 시작된다. ‘축전주차장 5.8킬로미터’라는 이정표 아래로 나무 데크 길이 조성돼 있다. 작은 싸리문에 들 듯 이 이정표 아래에 서면 바로 걷기 길 시작이다. 축전은 지난 2011년부터 열린 ‘대장경 세계문화축전’을 말하는데, 매년 가을 해인사 아랫마을 야천리를 주 무대로 열린다. 축전주차장은 야천리 위쪽 홍류동 계곡 옆에 조성돼 있다. 그러니까 해인사 절 아래부터 마을 어귀에 이르는 약 6킬로미터 길이 소리길의 시작과 끝인 셈이다.
홍류동은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흐르는 물조차 붉게 보인다 하여 홍류(紅流)라 이름 붙여졌다. 이 계곡은 최치원(857~?)과 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신라시대 고고한 인생을 살았던 선비 최치원은 유교 불교 도교에 두루 정통한 선비였으나, 신분제도의 벽에 가로막혀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재야에 머물다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이곳 홍류동은 그가 노년을 보낸 곳으로, 갓과 신발만 남겨둔 채 홀연히 신선이 됐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가람을 뒤로하고 걷는 길은 왠지 가뿐하다. 특히 아름드리 적송을 비롯해 굴참나무, 노각나무가 어우러져 뿜어내는 낙엽 냄새와 풀 냄새에 취해 걸어본다. 더러 풍뎅이 등 숲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곤충들이 튀어나온다. 그만큼 숲이 살아 있다는 뜻일 게다.
오후 6시가 넘어가자 낮 동안 계곡을 달군 볕까지 사라져 그윽한 분위기가 충만했다. 청아한 물소리는 제법 큰 소(沼)를 만날 때면 크게 울려 퍼졌다가, 작은 개울을 지날 때는 소곤소곤 소리를 냈다. 물소리는 천년 노송과 어울려 솔바람처럼 잦아졌다 잦아들기를 반복했다.
30분 남짓 걸었을 때 낙화담(落花潭)을 만났다. ‘꽃이 떨어지는 소’란다. 낙화담 전망대에는 국립공원관리소에서 설치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어젯밤 풍우에 골짜기가 요란하더니, 못 가득히 흐르는 물에 낙화가 많아라. 도인도 오히려 정의 뿌리가 남아 있어,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해지네’.
주변에는 노송만 있어 향기 나는 꽃은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 꽃가루를 이르는 말은 아닐 테고, 아마도 시인은 절벽 위에서 하얗게 흩어지는 물방울을 꽃으로 표현한 듯싶다.
낙화담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사람의 눈높이만한 소나무가지에 ‘하심(下心)’이라고 새겨진 푯말이 눈에 띄었다. 하심이라는 한자 밑으로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이라고 뜻까지 달았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천년 고찰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이라 그런지 자꾸 머릿속에 남아 맴돈다.
연이은 가야산 16경마다 새겨진 시
홍류동 계곡 6킬로미터에는 낙화담 같은 명소가 여러 곳 있다.
합천군이 지정한 ‘가야산 19경’ 가운데 16곳의 명소가 홍류동에 있다. 명진교를 넘어 길상암을 지나면, 제월담(霽月潭), 달빛이 잠겨 있는 연못을 만난다. 그다음은 선인이 내려와 피리를 부는 바위 취적봉(翠積峰), 풍월을 읊는 여울 음풍뢰(吟風瀨) 등이 나온다. 가는 곳곳마다 안내판에 시구가 새겨져 있어 잠시 휴식하며 음미할 수 있게 해놨다.
음풍뢰를 넘으면 농산정(籠山亭), 최치원 선생이 가야산에 들어와 수도한 자리다. 농산정은 다른 곳과 달리 작은 정자가 있다.
초저녁 산들바람을 벗 삼아 소일하는 어르신들이 자리를 잡았다. 아마 천여 년 전 최치원의 음풍농월, 풍류가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길은 어느덧 홍류문(紅流門) 앞까지 이르렀다. 해인사의 일주문이다. 이 길을 지나 다시 숲으로 들면 이제는 인공으로 조성한 길보다는 본래 있던 낙엽 길과 흙길을 만난다. 아마도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해인사에 몸담은 수많은 스님과 행자, 절 아래 마을사람들이 이 길을 지났을 것이다.
오후 7시, 길 시작과 함께 거닐었던 이름 모를 도반이 한 명 있었지만 그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숲은 이제 어두컴컴해져 더 이상 사진 촬영이 무의미해졌다. 북두칠성에 예향하던 곳, 칠성대(七星臺)를 지나자 오솔길이 끝났다. 오후 7시 15분, 소리길탐방 지원센터는 문이 닫혀 있었다. 대신 바로 아래서 주막이 하나 열었다. 주모 대신 나이 지긋한 남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늦은 시간에 내려오셨네. 계곡물에 등목 한번 하시지 그래.”
땀을 뻘뻘 흘리고 내려오는 모습이 짠해 보였나 보다.
“대구로 올라가는 차를 타야 해서. 시간이 많지 않네요.”
“지금 대구 가는 차를 탈 수 있으려나. 7시 35분이 막차인데.”
그의 포장마차 주막 한편에 붙은 버스시간표는 15분 빨랐다.
정확한 시간은 해인사발 7시 50분이다. 버스가 야천리까지 내려오면 8시 근방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의 시간표는 예전 것일 게다. 15분 빨리 출발하든 늦게 출발하든 별반 대수롭지 않은 삶.
홍류동 계곡의 시간표다.
주막을 지나 야천리 가기 전, 황산2구 마을 앞으로 작은 점방이 여러 개 있다. 잿빛 콘크리트 담벼락에 ‘막걸리·부추전·도토리묵·커피’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크게 돈 들이지 않고 담벼락을 광고판으로 쓴 동네 사람들의 재치에 웃음이 났다. 이 또한 홍류동 사람들의 풍류일 것이다. 가게 앞 평상에 동네 사람들 몇이 어울려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평상에 앉을까 말까 잠시 망설였지만, 한 잔 하고 나면 차편은 끊길 것이다. 입안에 고인 침을 걷어 들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행 끝자락은 흙과 풀 냄새 가득한 논두렁길
청량사로 들어가는 삼거리 갈림길에서 조금 내려오면 캠핑장이다. 소담한 규모의 캠핑장은 그리 번잡해 보이지 않았다. 사방 푸른 논밭과 암반으로 이뤄진 홍류동 계곡, 그리고 북쪽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가야산 능선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캠핑장은 아늑해 보였다.
시골의 논밭 전경은 언제 봐도 정겹다. 가야산을 배경으로 푸른빛과 향이 가득했다. 한두 달 뒤, 홍류동 계곡이 이름대로 붉게 물들 때 이 논도 황금빛을 발할 것이다.
오후 7시 40분, 해가 가야산 서쪽 능선 너머로 완전히 넘어가고 난 뒤의 논두렁은 풍뎅이 등 날벌레는 물론 물뱀까지 돌아다녔다. 축전주차장 옆 계곡에는 멱을 감는 동네 아이들 소리로 소란했다. 그러나 홍류동 계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영 금지다.
오후 8시, 야천리 버스정류소에서 대구로 올라가는 마지막 차편에 올랐다. 하루 걷기 여행으로는 알찬 여정이다.
글과 사진·김영주(여행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