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 고와라. 이거 아까워서 어찌 먹노.”
“따서 먹어보래이. 아주 혀가 녹는다아이가.”
여기저기서 감탄사 연발이다. 포도밭 이랑에 들어서자 포도 특유의 향긋한 냄새와 탐스러운 자태가 체험객을 유혹한다. 하얀 분을 가득 머금은 검은 포도가 탱글탱글하다. 하얀 분이 많을수록 당도가 높다는 표시이니 분이 많고 색깔이 진한 포도를 따면 된다. 포도 따는 법은 딱히 배울 것도 없이 간단하다. 잘 익은 포도의 가지를 잘라 따기만 하면 된다. 힘든 농사는 농부가 짓고 수확의 기쁨은 여행자가 누린다.
대구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경북의 작은 도시 영천은 사실 여행지로 이름난 곳은 아니다. 영천이 우리나라 지도 어디쯤에 있는 곳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여행지로서는 다소 생소한 지명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야 밖에 있는 영천이지만, 그 어느 지역보다 알아주는 것이 있다. 바로 국내에 흔치 않은 와이너리다. 와이너리(Winery)는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을 뜻한다. 아무래도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 국가나 미국, 호주, 칠레 같은 나라가 먼저 떠오르지만 영천에는 국내에서도 내로라하는 와이너리 18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영천은 강수량이 적고 일조량이 풍부해 김천·경산·영동과 어깨를 견주는 전국 최고 품질의 포도와 복숭아, 자두 등 당도 높고 질 좋은 과일 생산지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포도는 전국 최대 규모의 주산지다. 영천의 과일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작물이 포도다.
재배 면적이 전국의 14퍼센트를 차지하고 연 25만병의 와인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 와인 생산지이기도 하다. 질 좋고 당도 높은 포도를 생산하는 농가가 많은 덕분에 영천에서는 2007년부터 영천와인사업단을 꾸려 와이너리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2016년에는 와인 테마마을을 조성할 계획도 갖고 있다.
쉽게 만들지만 숙성 과정은 정성 가득
와인 투어는 포도 따기부터 와인 담그기, 와인 시음 등 와인의 세계를 맛보기로나마 체험해보는 여행이다.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먼저 시작점인 영천농업기술센터에 마련된 작은 와인 터널을 통과하며 영천 와인의 빈티지와 생산 과정 등 와인에 대한 기초적인 안내를 받는다.
20여분간의 짧은 설명이 끝나고 바로 영천 곳곳에 위치한 와이너리로 이동한다. 영천에는 그 특성에 따라 농가형·마을형·공장형·교육형 등 4가지 종류의 와이너리 18곳이 있어 그룹 특성에 맞게 배정되거나 여행자가 지정할 수도 있다. 와이너리에 도착하면 먼저 포도밭부터 들어간다. 체험자 각자 집으로 들고 갈 와인을 만들 포도부터 살핀다.
농약 걱정은 할 필요 없다. 덜 자란 포도만 약간 약을 치고 어느 정도 자라면 포도는 약을 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5일만 지나면 농약 성분이 사라진다니 안심해도 된다. 각자 2킬로그램 정도의 포도를 따서 체험자가 직접 만들 와인의 재료로 쓴다. 포도 2킬로그램은 대략 5~6송이 정도 되는데, 와인으로 만들면 750밀리리터 와인이 두 병 정도 나온다.
와인 담그기는 생각보다 간단하면서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하는 작업이다. 먼저 각자가 딴 포도는 3킬로그램 들이 통에 포도알을 전부 털어넣은 뒤 손으로 으깨고 뭉갠다. 포도알이 깨지고 물러져 보랏빛이 돌 때까지 뭉개는 작업이 계속된다. 이 포도 뭉개는 작업이 재미있다. 손에서 느껴지는 톡톡 터지는 감촉과 성한 포도가 즙이 되는 과정이 통쾌하다. 스트레스가 풀린다.
한참을 주물럭거리다 보면 포도알도 그 탱탱한 힘을 잃고 액체 반 건더기 반인 상태가 되는데, 여기에 세균을 억제하는 아황산과 발효를 돕는 효모를 넣는다. 통 뚜껑에 체험자 이름과 날짜를 기입하면 끝이다. 여기까지가 와인 투어에서 체험하는 와인담그기 과정인데 집으로 돌아가서도 할 일은 남아 있다.
1만2천원으로 나만의 와인을 만들다
온도에 따라 7~15일간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 저어주며 1차 발효를 시켜야 한다. 1차 발효 후엔 천에 건더기를 걸러내고 즙만 따라 유리병에 3~4일 넣어두었다가, 층이 생기면 아래에 가라앉는 이물질은 버리고 깨끗한 윗물만 따라 다시 6개월간 2차 발효를 시키면 레드 와인이 되는 것이다. 직접 딴 포도로 담그는 자기만의 와인은 그 맛과는 별개로 사먹는 와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색다른 의미를 준다.
각자의 와인을 담근 후엔 와이너리에서 만든 와인을 시음하는 시간이다. 산머루와 일반 포도의 개량 품종인 머스캣밸리로 담근 것도 있고 거봉으로 담근 것도 있다. 맛이 달고 색이 진한 머루포도로는 아이스 와인도 만든다.
맑고 쨍쨍한 하늘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인 ‘씨엘(Ciel)’은 영천 와인의 대표 브랜드다. 18개의 와이너리는 각각의 라벨을 갖고 고유한 맛을 유지하면서도 씨엘이라는 영천와인 공동 브랜드를 사용한다. 와인이 숙성되는 6개월~1년간 온도와 습도, 저장고의 특성에 따라 숙련된 와인 전문가의 적절한 관리가 필요하다. 독특한 개성이 있으면서도 일정 수준을 갖춘 와인을 생산하는 것이다.
와인 투어의 비용은 점심식사를 제외하고 2시간에 1만2천원이다. 포도 재료값도 안 되는 체험비다. 35명 이상이면 단체 버스비 30만원까지 지원해준다. 와인 투어는 11월 말경까지 계속되며 영천와인사업단 홈페이지에서 최소 3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
가을이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무더웠던 기억일랑 씻어내고 서늘한 포도밭에 앉아 한 움큼의 포도를 입안에 가득 넣고 오물거리며 포도향, 와인향에 취하고 싶은 계절이다.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 2013.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