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청계천 복원 사업이 완료되면서 청계천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현대사회에 들어와 청계천은 개발 논리에 밀려 많은 수난을 당했다. 조선시대에도 서울의 중심을 흐르는 하천인 청계천의 준천 사업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 논란이 전개됐다. 무엇보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홍수에 취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남산 등지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모인 물들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을 통해 한강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청계천이 넘치는 일이 잦아 도성 안의 홍수 피해로 몸살을 앓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태종·세종대에도 준천 사업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조선 후기인 영조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청계천에 쌓인 토사의 준설, 즉 준천 사업을 국가사업으로 추진하였다. 홍수 피해 방지의 측면과 함께 서울로 유입된 도시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영조는 재임 기간 중 준천 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 백성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1752년에는 친히 광통교(廣通橋)에 행차해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고, 1758년 5월 2일에는 준천의 시행 여부를 신하들에게 물으면서 구체적인 추진 계획을 세웠다. 영조는 승지 등이 모인 자리에서 청계천 다리 중 광충교(廣衝橋)가 작년에 비해 더욱 흙이 빠져 막혀 있음을 우려했다. 어영대장 홍봉한은 “만약 홍수를 만나면 천변(川邊)의 인가는 반드시 표류하거나 없어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라며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함을 건의했다.
일부 사관(史官)들은 백성을 동원한다면 민원(民怨)이 많을 것임을 지적하였지만 영조는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장기적인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하였다. 1759년 10월 6일 준천의 시역(始役)이 결정되었다. 준천을 담당할 임시 관청인 준천소(濬川所)가 설치되었고, 본격적인 준천 사업은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되어 4월 15일에 종료됐다.
57일간의 공사 기간에 20여 만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는데, 도성의 방민(坊民)을 비롯하여 각 시전(市廛)의 상인, 지방의 자원군(自願軍), 승군(僧軍), 모군(募軍)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참여하였다. 실업 상태의 백성 5만여 명이 품삯을 받았는데, 공사 기간 동안 3만5천 냥의 돈과 2,300여 석(石)의 쌀이 소요되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는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사업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최대 역점 사업을 청계천 공사에 두고 있음을 명시했다. 영조는 특히 가장 어려운 공사인 오칸수문(五間水門) 공사를 6일 만에 끝낸 사실에 흡족해 하였다. 홍봉한은 당시 맹인들도 부역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는 보고를 하였고, 영조는 백성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협조를 높이 평가하였다.
공사 기간 동안 영조는 친히 오칸수문에 직접 나와서 공사를 독려하기도 하였으며, 공사가 완성되자 연융대(鍊戎臺)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당시의 모습은 <준천계첩(濬川契帖)>에 네 점의 그림으로 남아 있다. 이 그림에는 공사에 동원된 소와 수레, 쟁기 등을 비롯하여 영조가 관리들과 함께 친히 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모습이 생생히 나타나 있다.
영조에 의하여 추진된 청계천 준천 사업은 당시의 국가적 현안을 백성들과의 소통을 통하여 해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탕평을 통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균역법의 시행으로 백성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면서 ‘서민군주’를 자처한 영조는 청계천의 준천 사업을 위민(爲民)에 근거한 국정의 최대 과제임을 인식하고 이를 실천한 것이다.
오늘도 유유히 흘러가는 청계천을 지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실천했던 영조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3.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