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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혼자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자 설 수 있고, 혼자 있어도 쓸쓸하지 않고, 혼자 지녀도 가질 것이 아직 많고, 홀로 힘을 휘둘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잘나고, 떳떳하고, 자신감이 넘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그래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자립(自立)·자존(自存)·자활(自活)은 그야말로 ‘성숙의 지표’니까요. 하지만 사람의 삶이 마냥 그래도 괜찮고, ‘스스로(自)’라는 뜻이 그렇게 단순한 것일는지요?
[SET_IMAGE]2,original,right[/SET_IMAGE]사람은 참 모자랍니다. 송아지는 어미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걷고 뜁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님께서 돌봐 주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 ‘돌보심’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께서 자신을 ‘나누어 주신’ 일입니다. 당신들의 몸을, 정성을, 마음을, 물질을, 시간을, 사랑을 새 생명을 위해 뚝뚝 떼어내 나누어 주신 일이 곧 보살핌입니다.
그 일로 부모님은 아프지 않아도 될 일을 겪으며 아프기도 하고, 편하고 좋은 삶을 버리거나 망가뜨리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래야 하나의 생명은 ‘자라고’ 마침내 사람 구실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라는 말은 ‘다른(他)’ 존재가 없으면 있을 수 없습니다. 홀로 선다는 것은 나 혼자 살아도 넉넉하다고 건방지게 구는 것과는 상관도 없습니다.
태어나고 자라기를 그렇게 ‘받으며’ 살아왔기에 사람은 주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삶이란 주고받는 일로 엮여 있습니다. 따라서 잘살려면 내가 내 모든 것, 곧 몸과 마음과 시간과 정성과 사랑을 남을 위해 먼저 떼어주어야 합니다. 삶이란, 사람이란 그렇게 살아야 비로소 삶다워지고 사람다워집니다. 나를 나누지 못하면 그 삶은 삶이 아니게 됩니다.
욕심부려 혼자 잔뜩 담아 놓고 다 먹지 못한 음식은 반드시 썩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면 즐거운 잔치가 됩니다. 게걸스럽게 재물을 모으면 언젠가는 그 재물에 치입니다.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없던 괴로움들이 삶을 짓누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나누면 삶은 가볍고 상쾌해지고 따뜻하게 됩니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재주, 전문 지식, 권력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게 있는, 남들이 갖지 못한 능력은 그러한 재능이나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만을 위한 것으로 사용하면 오래지 않아 주변에 사람이 없어집니다. 아쉬워 굽실거리기는 해도 마음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난 사람의 외로움은 그렇게 옵니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도와 주는 사람 아무도 없는 춥고 쓸쓸한 성탄 저녁 길거리에서 추위를 견디지 못해 성냥을 한 개비씩 켜던 작은 여자아이, 불꽃이 환한 순간마다 환상 속에 떠오르는 따뜻한 가족과 삶의 모습이 아쉬워 성냥을 켜고 또 켜던 배고프고 쓸쓸한 아이, 그런데 새벽길에 사람들은 얼어 죽은 추레한 아이와 그 아이 주변에 타다 꺼진 성냥개비들이 즐비한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나눔이 없는 삶의 종말은 그러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 소녀일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충분합니다. 사람은 홀로 살지 않습니다. 삶은 나눔에서 비롯하고 나눔으로 마칩니다. 그것이 사람살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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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