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인 1992년 3월, 대중음악 판은 늘 그랬듯 스타들은 즐비했다. 밴드 ‘부활’ 출신의 이승철, ‘무한궤도’에서 나온 신해철, 그리고 이승환이 젊은이들의 환호를 독과점했다.
가수지망생들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현식 같은 인물을 꿈꾸었고, 작곡가들은 유재하가 되기를 열망했다. 조용필은 여전히 ‘가왕’이었고, 이선희는 여가수 대표였다.
그때 언론과 대중의 화제를 독점한 가수는 미국의 ‘뉴 키즈 온 더 블록’이었다. 1992년 2월 이들의 내한공연 무대에서 수십 명이 다치고 급기야 한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지자 갑작스레 ‘청소년 문화’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뉴 키즈 사태’ 한 달 후에 곧 혁명이 될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이 나왔다.
사실 이때 음악가들이 댄스음악이나 랩에 민감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산울림의 김창완은 “댄스든 뭐든 3인조 그룹이 솟아오를 분위기”라고 관측했었다. 신해철은 히트곡 ‘안녕’에서 랩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만 그게 영어였다. 지껄이듯 빠르게 토해내는 래핑은 미국에서는 몰라도 한국에서는 좀 곤란하다는 정서가 지배적이었다.
“우리말로 랩 하기는 방정맞은 거 아닌가?”
“그건 미국 애들 얘기지.” 포크, 발라드, 록, 민중가요가 대세인 현실에서 우리말 랩에 대한 도전은 감행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바로 이걸 했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알 수가 있어요.’
<난 알아요>가 던진 쇼크와 센세이션은 변화에 대한 갈망과 맞물려 증폭되었다. 과감하게 우리말로 랩을 한 게 어떤 점에서는 음악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엄숙과 점잖음에 대한 비틀기였다고 할까. 이제 30대 중반이 된 당시 틴에이저들은 마치 이런 파격적인 노래와 회오리 춤을 기다렸다는 듯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1994년에 서태지는 강력한 록으로 채색한 3집 앨범으로 또한 차례 격변의 기치를 들어올린다. <발해를 꿈꾸며>, <교실이데아>, <내 맘이야> 같은 현실적, 도발적, 저항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로 사회와 교실을 발칵 뒤집어놓은 것이다.
아마 주류의 스타 가운데 기성질서와 가치에 대한 공세의 깃발을 휘날린 뮤지션은 서태지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사회성이 덧붙여진 결과로 서태지의 존재감은 단순한 음악가에서 한마디 한마디가 X세대에게 계시인 ‘사회적 리더’로 급부상했다.
‘10대 대통령’, ‘문화대통령’, ‘대한민국 음악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당대를 뒤덮은 수식들이 증거한다.
서태지 음악과 위상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서태지 20년이 알려주는 것은 아티스트의 실험과 도전이 대중예술을, 때로는 사회를 새로운 지평으로 안내해주는 동력이라는 사실이다. 담대하게 덤벼야 바뀐다. K팝의 해외공략과 인디의 분발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음악계는 서태지의 키워드인 도발정신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 상업성과 인기에 묶여 있다. 서태지가 필요하다는 말은 팬들에게는 재림의 바람이겠지만 음악계로서는 변화를 향한 타는 목마름의 표현이다.
글·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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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