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친구가 있는 강원도의 한 암자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천이 녹음으로 울창하고, 금방 소나기라도 내릴 듯 습하고 무더운 날이었다.
그렇게 스무 살의 내가 산길을 걸어 한참을 올라가고 있는데, 길 한가운데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걸 보았다. 나는 뱀을 노상에서 본 적이 없어 일단은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추어 섰지만, 잠시 후 그 풍경이 신비로웠다. 폭염의 무더위에 서늘한 어떤 기운을 본 것이다. 한여름에 내리는 눈을 본 기분이랄까, 인생에 그런 순간이 있다. 그것은 고스란히 내 가슴에 풍경으로 남았다.
그날, 나는 조심스럽게 뱀을 지나쳐서 친구를 찾았다. 암자에서 공부보다는 술 먹기에 열심이었던 친구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그냥 발로 툭 차 버리든지 잡아서 뱀술이라도 담가 먹어야 한다면서 입맛을 다셨다. 뱀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그 기억이 강렬하게 아직도 남아 있다.
이제는 삼십 년도 더 지난 일이라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어진 지가 오래되었다. 그 친구가 동대문에서 건어물 가게를 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것 같다. 친구도 그 산길의 뱀처럼 나에게서 아주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거다. 친구 역시 내 기억에 그렇게 남았다.
사람의 관계도 어떤 시절에는 용을 대하듯 하다가 어떤 시절에는 뱀을 대하듯 하는 법이다. 하여간 뱀은 되도록 그 거리를 멀리하고 싶다. 유행가 가사처럼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뱀은 지상에서 가장 낮게 살고 있다.
온몸을 땅에다 대고 기어 다니기에 뱀은 하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상 동물이다. 현실을 살고 우리들의 가난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뱀은 이미지가 어둡다.
설문조사를 하면 뱀은 호감도가 낮은 동물 중에 하나다. 서양에서도 뱀은 <이집트 사자의 서>를 비롯한 성경 등에서 매우 불길한 악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왜 우리 조상들은 십이신장 중의 하나로 뱀을 선택했을까. 뱀은 영리하기 때문이다. 뱀을 괴물이나 악마로 보지 않고 영리하고 민첩한 기능을 높이 사서 우리 인생을 보호하는 한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뱀처럼 살아야 할 때가 있다. 낮고 음습한 곳에서 머물러야 할 시절이 있다. 그 시절을 견디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큰 인물들이 모두 이러한 시절을 견디고 낮게 살아왔기에 어느 순간 뜻을 이루고 이름을 세상에 남기는 법이다.
나는 뱀이 현실을 대하는 그 밀접한 거리에 주목한다. 뱀은 삶의 터전인 땅에 가장 가까이 위치하면서 하늘을 멀리 둔다. 그런 뱀이 이무기가 되고 용이 되어 승천하는 것이다. 용이 되면 뱀은 땅과는 가장 멀리 있는 하늘 그 자체로 변신해 버린다. 용보다 뱀이 더 우리들의 현실에 가깝게 있다. 용을 본 적은 없지만 뱀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이 뱀을 호위 신장으로 선정한 이유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혜로운 기운, 뱀의 긍정적인 면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뱀을 뜻하는 ‘사(巳)’는 십이간지 중에 가운데 여섯번째에 위치해 있다. 올해를 나는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삼고자 한다. 뭔가 기운찬 일을 시작하는 그런 가운데 지점으로 이정표를 세운다.
글·원재훈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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