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찌개는 가히 국민음식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밥상에 흔히 오르는 일상식이다. 설령 외식을 할 때 다른 요리를 먹는다 해도 마무리는 대개 밥과 된장찌개로 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식사습관이다. 언론인 이규태는 “한국인은 된장만 있으면 식사를 해결하는데, 그것은 한국인의 존재 증명이요, 동일성”이라 했고 “한국적인 근력을 ‘된장살’, 한국적인 끈기를 ‘된장힘’”이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전쟁이 나서 임금이 피난을 가게 될 때 현지에 장 담그는 일을 책임질 합장사(合醬使)를 먼저 보냈다고 하니 당시의 식생활에서 장이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합장사를 뽑는 일을 놓고도 조정에서 입씨름이 많았던 모양이다. 허균의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는 정유재란 때 선조가 영변으로 피신하려는데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신잡(申)을 합장사로 임명하는 안건을 놓고 대신들이 언쟁하는 일화가 나온다. 책력에 신일(辛日)은 장 담그는 데 좋지 않다고 했는데 신잡의 성인 신(申)과 신(辛)의 발음이 같아서 안 된다고 훗날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지는 한준겸(韓浚謙)이 문제를 제기하는 장면이다. 농지거리 같은 이야기지만 우리 조상들이 장 담그는 일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시절에는 장을 담그려면 미리 택일을 하고, 장 담그는 아녀자들은 사흘 전부터 외출과 방사(房事)를 금해서 부정을 타지말아야 하며 당일에는 목욕재계한 뒤 고사를 지내야 했다. 장담그는 작업을 할 때는 음기(陰氣)의 발산을 막기 위해 종이로 입을 봉했으며 심지어는 개를 꾸짖어도 안 된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장을 담그는 데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된장을 먹었는지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식품사학자들은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고구려 사람들이 발효식품을 잘 만들어 ‘선장양(善藏釀)’이라고 했다는 기록과, 신라 신문왕이 683년에 왕비를 맞이할 때의 납폐 품목에 장(醬)과 메주를 뜻하는 시( )가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술, 또 발해의 명산물이 시였다는 점과 옛날 중국사람들이 시의 냄새를 고려취(高麗臭)라 했다는 사실 등을 들어 그 역사가 오래된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된장찌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은 것 같다. 찌개라는 음식 자체가 조선시대의 요리책에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19세기 말 <시의전서(是議全書)>에 ‘조치’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아무튼 된장은 1766년에 간행된 <증보산림경제>에 “촌야의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지 못하여도 좋은 장이 있으면 반찬에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하였듯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민족에게 훌륭한 부식 역할을 해왔다. 더욱이 된장에 고기, 두부와 버섯, 철 따라 냉이·달래 같은 소채를 듬뿍 넣고 끓인 된장찌개는 갖가지 영양소를 동시에 섭취할 수 있는 훌륭한 찬선이다. 게다가 그 맛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어머니와 함께 떠오르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식품사학자 윤서석은 “기름기 없는 고기를 꾸미로 넣고 별다른 건더기도 넣지 않은 채 풋고추의 향미가 서리던 된장찌개는 어느 육미찬물보다도 입맛을 돋우는 것”이라 했고 “어린 시절에 안채에서 풍겨오던 이 내음을 먼 곳의 그리움”처럼 느꼈다고 했다. 서울 양평동의 또순이네와 다동의 산불등심은 고깃집이면서도 뛰어난 된장찌개 맛으로 더 인기를 끄는 식당들이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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