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장이 밥도둑이 된 역사는 상당히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초기의 문신 서거정은 게장을 상당히 좋아한 듯 게장에 관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그중에서도 ‘촌주팔영(村廚八詠)’이라는 시에는 게장이 밥을 더 먹게 한다고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년에 비틀비틀 옆걸음 치던 곽색으로 / 當年郭索且
어찌 알았으랴 오정 사이에 젓 담글 줄을 / 那料沈五鼎間
한 딱지 두 집게다리가 모두 맛이 좋으니 / 獨殼雙俱有味
의당 술에 넣고 또 밥 더 먹기 꼭 알맞네 / 也宜點酒更加餐
조선 중기의 선비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전원에 칩거하며 많은 시를 남긴 이응희도 게장 맛을 예찬하는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껍질 속 향긋하고 노란 게장 / 香滑鉤金醬
다리 속 부드럽고 흰 맛살 / 甘柔嚼雪肌
고대광실에서 호식하는 이들은 / 朱門大牢客
이 맛을 알 리가 없으리라 / 玆味鮮能知
그런데 이렇게 맛있는 게장이 엉뚱하게 정변의 원인을 제공하는 일이 다 생긴다. 조선의 20대 임금 경종이 불과 36세의 나이에 병사하자, 그 죽음이 이복동생이자 영조로 왕위를 잇게 되는 연잉군이 게장과 생감을 먹여 독살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소론의 이인좌는 그것을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참수되고, 경종의 스승이었던 김일경 역시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맞서다 처형당했다.
<경종실록>에는 경종이 사망하기 며칠 전 “여러 의원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을 진어한 것은 의가에서 매우 꺼려하는 것이라 하여, 두시탕(豆湯) 및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진어하도록 청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독살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게장을 먹은 것은 사실인 셈이다. 아무튼 이즈음에는 게장이 수라상에도 오르던 음식임을 간파할 수 있다.
게장에 대한 기록은 <음식디미방> <규합총서> <주방문> 등 조선시대의 음식 관련 문헌에서 비교적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 말의 실학자 홍만선이 저술한 <산림경제>에는 술지게미로 게장을 담그는 조해법(糟蟹法), 술로 절이는 주해법(酒蟹法), 식초와 간장으로 담그는 장초해법(醬醋蟹法), 끓인 소금물로 절이는 침해법(沈蟹法) 등 갖가지 게장 담그는 법과 게 기르는 법(養蟹)까지 수록되어 있을 정도다.
<시의전서>는 게장 담그는 법을 “게젓을 담글 때 수유 잎으로 위를 눌러 가운데 넣어두면, 해가 지나도 모래가 나오지 않는다.
혹은 다시마를 넣기도 한다. 게젓을 밤에 낼 때에는 일절 등불을 비치지 않는 것이 좋다. 게를 깨끗이 씻어 항아리에 넣고 지령을 부어둔다. 3일 만에 지령을 따라내어 다시 솥에 달여서 식혀 붓는다. 또 3일 만에 지령을 다시 따랐다가 달인 뒤 부어서 익으면 먹는다”고 했다.
게장을 먹는 예법도 까다로워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서는 “게 뚜껑에 밥을 담아 먹지 말라”고 했다. 옛날 양반들이 요즘 사람들 게장 먹는 것을 보면 점잖지 못하다고 야단을 칠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에는 참게로 게장을 많이 담갔으나 환경오염으로 참게가 귀해짐에 따라 요즈음은 서해에서 나는 꽃게로 게장을 흔히 담근다. 꽃게장은 살이 많고 알이 꽉 찬 산란기 직전의 암게로 담가야 제맛이 나는데, 지금이 바로 그 시기다. 서울에서는 마포의 진미식당과 개화동의 제일한우촌이 간장게장으로 유명한 식당들이고 지방에서는 군산의 계곡가든이 알려진 곳이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