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에서 우주의 중심이 어디에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신학에서는 우주의 중심을 ‘신’이라 단정하여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에서 우주의 중심은 ‘인간’이요, 그 인간의 중심은 ‘자기’라 대답할 것이다. 입장에 따라 ‘국가중심주의’도 있고 ‘가족중심주의’도 있겠지만, 자기가 없으면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부처가 “세상 모든 것은 오직 네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라고 했고, 예수도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나 영혼이 세상 모든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 가운데는 탐욕스러운 이기적 인간도 있고, 오만불손하여 남을 무시하는 인간도 있다. ‘자기’라는 존재도 남과 단절되거나 대립하는 고립된 자기가 있고, 남과 잘 어울리는 개방적이고 사교적인 자기도 있다.
그래서 공자도 ‘극복해야 할 자기’를 말하기도 하고 ‘실현해야 할 자기’를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인간의 ‘자기’ 속에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함께 들어 있다. ‘자기’ 속에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이 있으니 스티븐슨은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라는 두 인물로 표상했고, 중국의 고전에서는 ‘자기’ 안에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라는 두 가지 마음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는 현실을 설명했다.
하기야 세상에 악한 자와 선한 자가 서로 뒤엉켜 있고, 혼란과 안정을 반복하고 있는 현실의 근원은 자기가 지닌 이중성에서 파생되어 나온 결과일 것이다. 자기가 존재하고 세상이 존재하는 한 이중적 구조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나 자기 속에서 ‘욕심’을 어떻게 통제하고, ‘양심’을 어떻게 내세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지극히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욕심’은 위태로운 것이지만 고삐를 놓치지 않고 잘 통제하면 자신의 삶에 큰 동력이 될 수 있다. ‘양심’은 쉽게 숨어버려 드러내기가 어렵지만 잘 찾아내어 꼭 붙들고 키워내면 자기 존재의 품격이 향상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 사랑 넘쳐흘러 부모·국가·인류로 뻗어나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자기 속의 양심을 잘 키워가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사랑할 수 있고, 또 자기가 살고 있는 조국을 사랑할 수 있다. 부모를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라고 아무리 도리를 따져 가르쳐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공허한 말일 뿐이다. 그래서 맹자는 “자기를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자기를 저버리는 자와는 더불어 일을 할 수 없다”라고 한 것이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알면 그 사랑이 가까이 부모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번져가고 멀리 인류와 사물에까지도 뻗어나갈 수 있다. 서울 종로구 홍파동에 있는 율곡 사당 앞 석벽에 율곡의 필적으로 “성품은 물 속의 물고기에서 하늘 위의 새들까지 모두 같으니 나의 사랑이 저 멀리 산골짜기까지 가서 머문다(性同鱗羽 愛止山壑)”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마치 어느 산골에서 솟아난 샘이 넘쳐흘러가서 멀리 바다에까지 이르는 것처럼, 잔잔한 물 위에 던진 돌의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며 호수의 끝에까지 이르는 것처럼, 그 사랑이 인간이 사는 세상을 모두 적셔 생명이 싹트게 하고, 나아가 자연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사랑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아니겠는가.
글·금장태(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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