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언가를 더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쥐고 있던 것들을 그만 내려놓고 싶어 여행길에 나서기도 한다. 생각이 필요해 걷기도 하지만 생각을 끊기 위해 걷기도 하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걷는 길이란 사실 어디든 시작이면서 또 끝이다. 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길, 꼭 새해 첫날 0시가 시작점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언제든 어디서든, 걷기 길이든 인생길이든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강릉 바우길은 내륙과 해안을 오가며 16개의 코스를 가지고 있으니 걷는 자가 누릴 수 있는 선택의 폭은 넓다. 오늘은 어느 코스를 걸을까. 강릉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동해의 푸른 물과 경포대를 지나치고 가기는 아쉬운 일. 해송 숲과 경포대, 바닷길을 한번에 걸을 수 있는 5구간을 택한다. 더구나 이 길에는 강릉커피거리가 있어 길을 걷다 마시는 커피 한잔의 매력까지 흠뻑 느껴볼 수 있다.
해변과 경포호 휘도는 5구간 16㎞ 하룻길로 넉넉
바다호숫길이라 이름 붙은 바우길 5구간은 강릉항에서 시작해 안목해변과 송정해변의 솔숲, 커피거리를 거쳐 경포호를 한 바퀴 휘돌아 걸은 후 경포해변·순포해변을 지나 사천항까지 가는 길이다. 약 16킬로미터로 하루 걷기에 좋은 코스인 데다 중간에 놓인 경포호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바다와 솔숲이 펼쳐지는 해송숲을 겸한 바닷길이다. 구간의 양 끝점인 사천항이나 강릉항 어느 방향에서 시작해도 좋지만 강릉고속버스터미널을 이용한다면 강릉항이 보다 가깝다.
길에 들어서면 겨울을 지내고 조금은 잠잠해진 봄 바다를 가장 먼저 만난다. 봄 바다는 움츠렸던 몸을 깨우려는 듯 그 활기찬 푸름으로 객을 맞이한다. 객은 별다른 준비도 없이 문득 그 바다의 주눅 들지 않는 푸름과 마주하고는 뭔지 모를 부끄러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색채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변주하는 바다의 재능이 새삼 놀라운 순간이다. 그래,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것 없이 문득문득 바다를 찾는다. 그 푸름과 넓음을 마주하기 위해서.
바다를 옆에 끼고 걷는다. 길이란 다양한 재미를 숨기고 있다.
길 가다 만나는 사람, 길 가다 먹는 주전부리, 길 가다 맡는 꽃향기, 풀 냄새, 거름 냄새까지도 일상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감흥을 준다. 길 가다 올려다본 하늘은 매일 보던 그 하늘이 아니고 저 별과 달도 집에서 보던 것들과 다르다. 숨은그림찾기 놀이를 하듯 낯선 길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이 새롭다. 더구나 봄길이라면 만물의 싱그러움에 대해 절로 감탄하게 된다.
해송 숲과 바다가 조화롭게 이어진 5구간은 어울리며 걷기도, 혼자 걷기도 썩 괜찮은 길이다. 내내 평지를 걷는 길이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산길이나 숲길이 부담스러운 사람이나 무릎관절이 좋지 않은 연령, 혹은 어린아이에게도 부담 없다. 길 폭이 넓어 가족이나 친구와 못다 한 이야기 나누며 손잡고 걸어도 좋고 홀로 바다를 곁하며 무념무상 걷기도 좋다. 걷다 보면 어느새 파도 소리가 마음으로 흘러든다.
솔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커피향
오르지 않고 내리지도 않고 다만 두 다리를 연거푸 같은 힘으로 움직여 쉬엄쉬엄 편하게 걷다 보면 걷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풍경에 동화된다. 어쩌면 철썩대는 동해의 푸른 바다는 무심코 함께 떠나왔던 그 시절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지도 모른다. 두 발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 걸음걸음. 한동안 자판을 두들기며 잃어버렸던 손가락의 아날로그 기억이 손 편지를 쓸 때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그렇게 몸은 자동차를 벗어나 뚜벅이의 기억을 천천히 끄집어낸다.
비가 오면 숲의 색은 더 선명해진다. 더불어 먼지에 덮여 있던 듯 뿌옇던 머릿속도 차츰 선명해온다. 사물의 짙은 빛깔이 습기먹은 공기처럼 진하다. 바라보는 내 눈도 더불어 깊어진다. 모든 것이 점점 더 또렷해진다. 평지이면서도 소나무로 둘러싸인 이 길은 부슬부슬 잔비가 내리는 날에도 추천하고픈 길이다. 비 오는 숲은 맑은 날의 숲과는 또 다른 운치를 자아내곤 한다. 옅게 안개라도 낀다면 그 길은 눈에는 뿌옇겠지만 외려 나와 더 절친하게 만나는 지름길이 될지도 모른다.
피톤치드를 아낌없이 뿜어내는 솔숲의 청량감은 산길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가슴 뿌듯하게 스며든다. 아낌없이 내주는 숲에서 그야말로 아낌없이 마실 수 있는, 막힌 코가 뻥 뚫리는 시원한 공기를 벗하며 가능하면 천천히, 쉬엄쉬엄 걸어볼 일이다.
그 곁에 커피 한잔의 여유까지 찾아든다. 커피 향과 바다 향이 섞여 알 수 없는 묘한 향기를 뿜어낸다. 그 향은 유년의 기억같기도 하고 다가올 시간의 예고 같기도 하다. 인간의 오감 중 가장 예민한 것이 코라고 했던가. 때로는 어떤 향기만으로도 사람들은 추억에 젖거나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향기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그 어떤 감상을 싣고 있는 게 분명하다.
커피 향으로 그리고 바다 향, 솔 향으로도 충분히 향기테라피가 된다. 나를 얽어매던 스트레스가 슬며시 걷히고 마음은 잔잔한 저 바다의 모습처럼 평안의 길로 접어든다. 커피가 주는 마력이야 익히 알고 있었건만 그 커피가 바다를 벗하니 자연과의 교감은 배가 된다. 커피를 마시는 단순한 행위에도 사람의 오감이 하나로 열릴 수 있다. 입과 코와 눈이 커피를 마시고 귀와 손은 바닷바람, 솔바람을 맞는다.
벚꽃 만발한 길가에는 연인들 사랑이 꽃보다 만개
해송 숲을 걷다 보면 시나브로 경포호에 접어든다. 경포호는 바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심상을 자아낸다. 갇혀 있는 물이지만 원한다면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 친근하다. 경포호를 한 바퀴 돈다. 길가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연인들의 사랑은 꽃보다 더 만개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분명 거짓이 아니다. 경포호 한 바퀴는 자전거로 도는 것도 좋다.
집과 직장을 오가던 길 같았으면 자동차로 단숨에 가로질러버렸을 거리인데 새삼 이것저것 기웃거리고 이 사람 저 사람 살피느라 함흥차사로 걷는다. 목적 있는 걸음이 아니니 이런들 저런들 상관없다.
적당히 출출할 때 인심 좋은 곳에서, 곧잘 말 통하는 길동무와 술 한잔에 주전부리를 먹는 재미 역시 목마르도록 걸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걷기에 보태어지는 삼삼한 재미. 때로는 길동무와 술 한잔 하는 재미에 걷기가 보태어진 것 같을 때도 있다.
경포호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 3킬로미터 근방의 반가한정식집으로 간다. 거나하게 한 상 잘 차려진 시골밥상을 부러 찾아가는 까닭은 도시의 인스턴트 생활에 지쳤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시골집이 못내 그리워서이기도 하다. 그렇게 찾아 들어간 시골밥상에서 음식을 준비한 사람의 손맛과 정을 음식보다 더 배부르게 담아온다.
함께 밥 숟가락을 뜰 길동무가 있었기에 거나한 상차림과 달큰한 술 한잔을 마냥 즐겨볼 수 있다. 혼자 걷는 길의 고즈넉함도 좋지만 이럴 땐 함께 걷는 길의 유쾌함도 그에 못지않음이 새삼스럽다.
여행이란 하릴없는 시간에도 집에서 편하게 누워 있지만은 않겠다는 작은 의지. 정말이지 그 ‘불필요한 체력소모’를 위해서 우리는 늘 어딘가로 떠나곤 한다. 여행을 떠나지 않더라도 삶은 전혀 어그러지지 않지만 여행이라는 사치성 항목에 우리는 삶에 꼭 필요한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고는 한다. 삶이 의미 없고 어렵다고 느껴질수록 외려 여행은 더 절실해져만 간다.
아름다움을 좇아가는 것은 사람의 본능.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들에 동경을 품는 것도 사람의 자연스런 마음이다. 시골에서는 도시의 빌딩숲을 보러 여행을 떠나고 도시에서는 바닷바람, 솔 향기가 그리워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그런 목마른 사슴, 아니 사람들의 목을 축인다. 다시 갈증이 나기 전까지 그런대로 진득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길이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이 그 길 위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훌륭한 걷기는 없을 테다.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