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만큼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물고기도 없을 것이다. 학창시절 멸치볶음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 가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고, 고추장에 찍어 먹는 마른 멸치는 반찬은 물론 술안주로 지금도 인기가 있다.
한국 사람이면 매일같이 먹는 각종 국과 찌개의 국물 재료로라도 멸치가 우리의 밥상에 오르지 않는 날은 드물다. 오죽 많이 먹었으면 조선 후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마른 멸치는 날마다 먹는 반찬(日用恒饌)으로 삼는다”고 했을까.
멸치젓갈도 김치에 흔히 들어가니까 우리의 일상식이 된 지 오래지만, 싱싱한 멸치는 먹을 기회가 그리 흔치 않다.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어버리는 멸치의 습성 때문인데, 그래서 한자로는 그 이름을 ‘멸할 멸(滅)’ 자를 써서 멸어(滅魚) 또는 멸치어(滅致魚)라 했다.
멸치는 별칭도 많은데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행어(行魚)라는 이름으로 제주목과 함길도의 토산물로 각각 기록되어 있으며 <일성록>에는 며어(滅魚)라는 명칭도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인 김려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에서는 멸아((滅兒), 말자어(末子魚) 혹은 기기(幾幾)라 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추어라 하고 속명을 멸어(蔑魚)라 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고서를 인용해 추천석( 千石), 잡소어(雜小魚), 추백어, 소어(小魚)라는 호칭도 기술하고 있다.
멸치는 그 많은 이름처럼 잡히기도 많이 잡힌다. 19세기 초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서는 “동해에서 나는 멸치는 방어 떼에 쫓겨 마치 큰 파도같이 몰려오는데, 어부들이 이를 큰 그물로 가득 잡아 방어를 골라낸 후 모래사장에서 건조시켜 판다”고 했다. 잡히는 양이 얼마나 많았던지 “한 그물이 산과 같다(一網如山)”거나 “한 그물로 배가 가득 찬다(一網盈船)”고 했을 정도다.
예전에는 주로 긴 띠처럼 생긴 후릿그물을 양쪽 끝에서 잡아당겨 멸치를 잡았던 모양인데 오영수의 단편 <갯마을>은 그 장면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초여름이었다. 어느 날 밤, 조금 떨어진 멸치 후리막에서 꽹과리 소리가 들려왔다. 여름들어 첫 꽹과리다. 마을은 갑자기 수선대기 시작했다. 멸치 떼가 몰려온 것이다. 멸치 떼가 들면 막에서는 꽹과리나 나팔로 신호를 한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막으로 달려가서 그물을 당긴다.”
멸치잡이도 정치망·유자망·권현망 등으로 조업을 하게 되면서 어획량이 엄청나게 늘었다. 1970년에 5만 톤을 조금 상회하던 것이 요즈음은 26만 톤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 멸치 조업의 메카는 부산의 기장군 대변항으로 매년 봄이면 멸치축제가 열린다.
멸치의 명산지로는 남해도 빼놓을 수 없다. 남해는 멸치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죽방멸치의 본고장이다. 죽방멸치는 물살이 빠른 곳에 죽방렴이라는 대나무로 만든 그물을 세워서 잡는 멸치를 말한다. 그물을 이용하면 대량으로 멸치를 잡을 수 있지만 멸치를 털어낼 때 몸에 상처가 생긴다. 그러나 죽방멸치는 죽방렴에 들어간 멸치를 뜰채로 떠내므로 어획량은 적어도 손상이 없어 상품 가치가 높다.
정약전은 멸치를 “선물용으로는 천한 물고기”라 했지만 죽방멸치는 요즈음 고가의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멸치는 요리도 다양하다. 회·무침·물회·조림·찌개·구이·쌈밥·튀김 등이 유명하지만 멸치밥과 어죽·전·멸치시락국·멸치섞박지도 별미다.
부산 대변항의 용암할매횟집과 남해의 우리식당이 현지에서는 멸치 요리로 알려진 집이고, 서울에서는 잠원동의 진동횟집에서 봄철에 맛볼 수 있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