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계룡산이다. 닭볏을 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계룡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산은 예부터 신령한 기운이 서려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어디서 도를 닦다 왔다는 사람의 출신은 뻑 하면 계룡산이고 계룡산 인근의 절인 갑사와 동학사, 신원사 같은 절들에도 영험한 기운이 흐른다 한다.
그런 영험한 기운 같은 것은 잘 느끼지 못하는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그런 장소들은 다만 사색하기 좋은 고요하고 평안한 곳으로 통한다. 걸으면서 삶의 온갖 소용돌이 속에 들떠 있던 기운이 차분히 내려앉고 더불어 산과 숲에서 오는 좋은 기운을 받는다.
공주는 무엇보다 번잡하지 않아 좋다. 관광객이 몰리지 않는다. 갈 곳 없고 볼 것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 여행지로서는 다소 묻혀 있는 듯하다. 산 좋아하고 절 좋아하는 사람치고 공주 계룡산, 갑사 한 번쯤 안 찾은 사람 없겠으나 보통의 여행자, 특히 걷기 좋아하는 여행자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지역이다.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는 사람들의 발길로 닳을 지경인데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 같은 도시들은 왜 묻혀 있는 걸까.
경주 남산, 불국사가 얻는 명성에 비해 공주 계룡산과 갑사가 받는 조명은 부실하다. 물론 신라의 1300년 수도였던 서라벌 경주에 비하면 옛 웅진이었던 공주는 64년의 짧은 기간 백제의 수도였다는 점에서 경주보다는 수도로서 역사가 짧고 유물이 적은 것도 이유가 되겠다.
공산성 성곽길 걸으며 백제의 숨결을 느끼다
역사는 승자만 기억한다고 했던가. 다소 비약일 수도 있지만 과거 삼국 전쟁에서 신라의 승리가 현재 관광산업에도 그대로 재현되는 듯하다. 허나 즐겨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사람의 발길이 뜸한 장소는 말만 떠들썩한 맛거리에서 고수의 맛집 하나를 발견했을 때처럼 신선하다. 때 묻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그만큼 공주의 여러 장소들은 그 무명에 비해 가볼 만한 곳이 많다. 낯선 이름의 공산성으로 발길을 옮긴다. 백제 때는 웅진성이라 불렸던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원년인 475년에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후 성왕 16년인 538년에 사비(부여)로 다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왕성이었다.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 인조 때 석성으로 개축했다.
말하자면 터는 백제의 성터지만 성곽 자체는 조선시대의 것이다.
공산성은 해발 110미터로 금강과 공주시내를 굽어보며 서 있다. 한 나라의 성으로서 공격에 대비한 방어와 나라살림 조망에 아주 좋은 위치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성의 길이는 2,660미터로 한 바퀴 휘돌아 걷기에도 좋은 코스다. 한 바퀴 도는 동안 문화재로 지정된 금서루·진남루·쌍수정·영동루·광복루·공북루 등 여러 누각뿐 아니라 왕궁터와 사찰, 연못 등 다양한 백제의 문화유적을 만나게 된다.
성곽 위를 아슬아슬 걷기도 하고 전망대에서 망연히 금강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궁터가 있었다는 너른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보기도 하고 누각에 올라 마음속으로는 슬며시 호령도 해본다.
깃발 펄럭이는 성곽을 따라 걸으며 공주시내와 금강을 한눈에 내려다보니 그 풍경처럼 마음도 탁 트인다.
나를 찾아 자연에 안기는 ‘마곡사 템플스테이’
태화산 자락의 마곡사에서 하루를 머문다. 절에서 하루 묵는 것은 명상과 고요를 사랑하는 여행자의 하룻밤 호사다. 마곡사는 설법을 들으러 이 골짜기로 모여든 사람들이 마치 삼밭의 삼이 일어선 것처럼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예부터 큰 절이었다.
마곡사 템플스테이는 꽤 체계적으로 진행된다. 휴식형과 체험형으로 나뉘어 있어 여행자의 취향을 존중한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을 돌아보고 삶을 다시 단단히 붙들어 앉히고 싶을 때라면 휴식형이 좋겠다. 절 뒤의 솔바람길을 걷고 차 한잔 마시며 여유를 가질 수 있다. 혹은 불교가 궁금하고 절에서 행해지는 이런저런 의식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체험형을 택할 수도 있다.
산중 절 생활의 고즈넉하고 깊은 맛을 볼 수 있기는 마찬가지다. 속 시끄럽고 어지러운 말일랑 잠시 잊어도 좋다. 누군가와 함께 있더라도 눈빛과 미소만 주고받는다. 말이 필요 없는 곳, 말없이도 편안한 세계로 들어간다.
굳이 사색에 잠기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어떤 생각에 집중하려거나 부러 스트레스를 던지고 편안한 마음이 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저 가만히, 그대로 거기 있는 나를 느끼고 보듬는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아무 생각도 나서지 않으면 그대로 무념무상인 채로 자연에 안기면 된다.
어디든 한두 평 누울 자리만 있다면 그곳은 그저 편안한 잠자리가 된다. 눈을 감고 나면 호화로운 침상이나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일까. 육신이 잠들고 나면 내 몸 하나 이리저리 뒤척일만한 이부자리 하나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천천히, 괜찮아, 잘했어, 사랑해’는 마곡사 템플스테이의 모토다. 남보다 앞서가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어딜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
아침에는 마곡사 뒷산의 솔바람길을 걷는다. 솔바람길 걷기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도 포함되어 있다. 솔바람길은 3개 코스로 나뉘어 있는데 부담 없이 걷기는 1코스 백범명상길이 좋다.
거리는 3킬로미터 정도이고 1시간 정도 걷기에 무난하다.
김구 선생의 발길 따라 백범명상길을 걷다
마곡사에서 출발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순환코스다. 백범선생이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후 마곡사(당시 백련암)에 은거하며 수도생활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백범명상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코스 중간에 백범 선생이 머물던 집터와 삭발터도 만날 수 있다.
초입의 경사 길만 오르고 나면 소나무 가득한 숲길은 아늑하고 포근하다. 흙 위에는 솔잎이 융단을 깔아놓았다. 한 걸음 한걸음 걷는 걸음이 폭신하다. 춘마곡·추갑사라 했던가. 봄의 숲길은 진달래 잔치도 열었다. 분홍 물감을 흩뿌려놓은 듯 산길의 곳곳이 점점이 수놓은 수줍은 분홍으로 물든다.
진달래는 그 모양은 비슷하지만 진한 색으로 군락을 이루는 철쭉과는 다르게 조금 쑥스러운 듯 피어 있다. 흐드러지게 핀 꽃잔치가 아니라 필까 말까 조금씩 세상 밖 풍경을 살피며 피어난다. 꽃길을 걸으며 하늘 한번 보고 먼 산도 한번 보고 발치도 한번 내려다본다. 이유없이 흐뭇한 발걸음이다. 자연이 주는, 이유도 대가도 설명도 필요 없는 보약 같은 길이다.
마곡사가 보일락 말락 하고 거의 내려올 즈음이 되자 군왕이 나오는 기를 갖춘 터라는 군왕대가 너른 팔을 벌리며 기다리고 있다. 길 한쪽에 있어 자칫 놓치기 쉽다. 군왕을 태어나게 할 만큼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는 이곳을 놓치지 않고 들른 것만으로도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정방형의 터에 들어서니 솔바람이 세게 분다. 비가 올 모양으로 산들산들 흔들리던 소나무 가지들이 더 크게 흔들린다. ‘솨아악’ 하고 거세게 솔바람을 내놓는다. 머리를 날리며 바람을 맞는다. 그 좋다는 터에 가만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본다. 군왕의 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갈 길 무탈히 가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그 바람을 맞는다.
“바람아~ 멈추지 말고 계속 불어다오. 더불어 내 소박한 바람에도 기를 넣어주오.”
군왕대에서 하는 잠시의 풍욕으로 심신에 슬며시 바람을 불어넣는다. 그냥 바람이 아니다. 김구 선생이 맞던 그 바람, 군왕을 나오게 한다는 그 바람, 소나무가 마냥 내어주는 시원한 솔바람이다. 바람 맞는 기분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