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탄생은 흔히 회자하는 이야기와는 달리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적 측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부산의 향토음식 밀면이 딱 그런 경우다. 밀면은 냉면과 흡사하지만 면의 원료로 메밀가루가 아닌 밀가루를 쓴다는 점이 다르다. 냉면같이 육수에 담가서도 먹고 비빔으로도 먹는데 밀면이라는 이름도 밀냉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향토음식이라고는 해도 밀면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아서 6·25전쟁 직후부터 흔히 먹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즈음 이른바 PL480(미국 공법 480호 농업수출진흥 및 원조법)에 의해 잉여농산물 무상원조를 받아 많이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인 김관식이 “한미합동! 우정과 신뢰의 악수표 밀가루”라 노래한 바로 그 밀가루 말이다. 나이 지긋한 이들에게는 추억의 끝자락에 남아 있는 구차했던 시절의 상징이다. 밀면의 대중화는 냉면에 대한 수요와 밀가루의 공급이 맞아떨어져서 생긴 셈이다.
밀면의 발원에 대해서는 설이 엇갈린다. 가장 흔한 설명은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고향에서 먹던 냉면이 먹고 싶을 때 구하기 힘든 메밀 대신 밀가루로 해먹은 것이 그 유래라는 것이다.
당시 부산의 대표적인 피난민촌이었던 우암동에 그 시절 함경도 출신 아주머니가 개업한 밀면집이 지금까지 3대를 이어 성업 중이어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피난민 기원설을 반박하는 견해는 진주 밀국수냉면 유래설이다. 멸치육수에 밀가루면을 말아먹는 진주의 전통음식 밀국수냉면이 밀면의 효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1925년에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밀국수냉면이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그럴싸한 해설까지 따라붙는다. 진주 역시 냉면으로 유명한 고장이고 보면 이 견해 또한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밀가루가 귀해서 밀국수냉면이 과연 서민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예부터 주식이 쌀이던 우리나라에서 밀은 귀한 곡식이었다. 고려 중기에 송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의 저서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고려에는 밀이 적어 화북에서 들여와 밀가루 값이 매우 비싸서 성례 때가 아니면 먹지 못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출간된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에도 “국수는 본디 밀가루로 만든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메밀가루로 만든다”고 했을 정도니 그때까지도 여전히 밀이 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에도 우리나라의 밀 생산과 소비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1918년에야 진남포에 일본인들에 의해 첫 제분공장이 설립되었는데 이때 생산된 밀가루는 막걸리를 빚을 때 필요한 누룩을 제조하는 데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국내 최장수 국수공장인 ‘풍국면’이 문을 연 것은 1933년이다. 그러다 1960년대 이후 정부의 분식장려정책에 따라 밀 소비량은 급격하게 늘어났고 동시에 수입량도 크게 늘어났다.
돌이켜 보면 곡식 팔자도 시간문제다. 그렇게 귀했던 밀가루가 구호물자로 전락했다가 지금은 가장 대중적인 식재료가 되었지만, 구황식품이었던 메밀은 요즈음에 와서 웰빙에다 고급 식재료로 각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평양식 메밀냉면도 좋지만 누구나 어려웠던 피난 시절을 생각하며 밀면 한 그릇 뚝딱 비우면 어떤 무더위도 쉽게 날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부산에는 앞서 언급한 밀면의 원조 내호냉면과 동의대 인근의 가야밀면, 개금시장의 개금밀면이 소문이 자자한 집들이고 서울에서는 진관동 북한산 입구의 가야밀냉면에서 그 맛을 볼 수 있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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